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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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시절

정홍수

정홍수

바로 옆 골목에 있던 약국집.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골목이었고, 다닥다닥 집들이 붙은 동네라 거리로는 몇걸음 안 되었을 테다. 무슨 간판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여염집에서 한약재를 취급하고 약도 지어주었다. 그 동네 집들이 다 그런 것처럼 드르륵 문을 열면 바로 마루로 이어졌는데 집 안은 늘 어둑했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약봉지며, 훅 하고 끼치던 한약 냄새, 약재를 썰던 시커먼 작두, 서랍 빼곡한 약장이 기억난다. 전쟁 때 내려온 월남민 가족이었는데 ‘이북 사람’이란 호칭을 그때 처음 들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 얼마간은 어머니 따라 자주 그 약국집으로 놀러 갔다. 동네 사랑방이었던 듯한데 좁은 마루며 방에 늘 사람이 북적였다. 쪽진 머리에 무명 한복 차림이었던 약국집 아주머니는 이야기 솜씨가 뛰어났다. 이야기를 바치던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고 동네 아주머니들도 달게 이어지는 약국집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개는 귀신이 등장하는 무서운 이야기들이었다. 입가에 침을 하얗게 비치고 눈을 깜짝거리며 이야기를 찰지게 조근조근 풀어가던 약국집 아주머니의 모습은 꽤 먼 시간 저편의 일인데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산갈치’ ‘대숲’… 삶과 죽음에 대한 외경

 

약국집 아주머니를 떠올리게 된 건 최근에 나온 전성태의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창비 2015)을 읽으면서다. 소설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품이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인데, 아마도 작가 자신으로 짐작되는 소설화자는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노모에게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돌려드린다’. 하루하루 가까운 시간의 일부터 어머니의 기억이 지워져가는 것을 보면서 화자는 기억이란 게 “물리적인 경계” 위에 쌓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9월의 기억이 지워지고 8월의 기억이 지워졌다. 70세의 기억이 지워지고 60세의 기억이 사라졌다. 어미로서의 기억이 사라지고 신부의 기억이 사라진 후 친정의 기억마저 지워졌다.”

 

노모의 입에서 맥락 없는 웅얼거림만이 남게 되었을 때도, “엄마!”란 말과 “밥 좀 줘” 하는 말에는 반응을 보이셨다는 삽화는 슬프다. 어떤 망각의 위세도 지울 수 없는 삶의 근원적 지점이 ‘엄마’와 ‘밥’ 두 단어일 수밖에 없는 한 세대 한국 여성의 시간이 거기 있다. 그런데 노모의 기억이 이제 그녀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열살, 다섯살, 세살 무렵으로 돌아갔다면 어째야 하나. 아들이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어머니 역시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일 테고, 그것은 그렇게 물려받고 물려준 세계일 것이다. 소설화자인 아들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기억이기도 한 세계. “그것은 어머니가 물려준 세계였다. 그만큼 어머니와도 친연성이 있는 세계라 믿었다. 어머니는 그 말랑말랑하고 신비한 세계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아들은 이제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돌려드리고자 한다. 바다와 산을 오가며 보름씩 산다는 산(山)갈치와 백년에 한번 하얗게 꽃을 피운다는 대숲 이야기를.

 

수십번도 더 들은 그 이야기들은 아들에겐 황당하고 신기하기도 했으나, 어머니에게는 그냥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말랑말랑한’ 사실 말이다. 돌아가신 당숙할머니는 어느 새벽녘에 사철울타리에 올라앉은 다섯발 길이의 산갈치를 절구로 쳐서 잡았다고 하지 않았나. 애호박 다섯통을 넣고 끓여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는 그 산갈치의 이야기 속 생김새는 나중에 63빌딩 수족관에서 확인한 박제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개가 없는 것을 빼고는. 요양원 침대에 누워 저 먼 세계에 있는 듯싶은 노모는 가끔 아들이 돌려드리는 산갈치 이야기며 대숲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고 소설은 전한다. 왜 그러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린 시절 선친으로부터 산갈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정말 산갈치를 보셨던 것일까. 이제는 물어볼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가을갈치에 애호박이나 무를 넣고 바글바글 국물 있게 끓인 갈치조림이다. 그건 선친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새삼, 이야기란 무엇인가. 전성태의 소설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몸의 기억을 타고 흐르는 이야기, 그 전승과 소통의 슬프고 애틋한 국면만은 아니다. 혹은 이야기에 깃들기 마련인 환상이나 상상의 지평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에서 화자는 어린 시절 ‘혼불’을 맞은 뒤 주변사람들의 죽음을 예감하는 꿈에 시달린 경험을 전한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들려준 산갈치 이야기며 대꽃 이야기는 실은 그 ‘무서운’ 꿈을 달래고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아들이 돌려드리는 이야기 또한 그러하리라. 노모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고 늦추고 싶은 소망 속에서.

 

우리는 ‘가난’을 잊은 대신 무엇을 얻은 것일까

 

우리 시대에도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당장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티브이를 켜보라. 섬세하게 가려서 말해야 할 문제겠지만, 관음증을 부추기는 이야기의 더미가 계속 쏟아져나온다. 엽기적인 드라마, 혹은 가공된 리얼리티쇼에 동원되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들은 재빨리 돈으로 환산되고 수거된다. 물론 세상의 변화만큼 이야기의 운명도 이전 같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콘텐츠’나 ‘정보의 당의정’으로 이야기의 거주지가 바뀌고, 이야기가 ‘개발’되게 된 현실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외경과 존중의 감각을 찾기 어려운 이즈음의 세태가 거꾸로 투영되어 있는 것도 같다. 이야기는 아마도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세상의 시간에 공백과 연기(延期)의 틈을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그때 그 틈은 다른 무엇으로 환산되지 않는 시간의 결 같은 것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금은 두텁게 만들지 않았을까.

 

전성태 소설 속의 어머니는 이야기를 보채는 아들에게 졸음에 겨운 얼굴로 말한다.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우리는 그 ‘가난’을 잊은 대신 무엇을 얻은 것일까. 그 시절 약국집 아주머니의 귀신 이야기는 왜 그렇게 피하고 싶으면서도 달았던 걸까. 약국집도 그랬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던 그 동네 사람들은 다 가난했다. 가난을 예찬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오늘만은 그때가 그립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5.3.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