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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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러쎌 뱅크스 『감미로운 저세상』

‘소설’로 애도하다
-러쎌 뱅크스 『감미로운 저세상』

 

 

gammi참사와 소설

 

대참사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1989년 9월 21일 오전 7시 30분, 미국 텍사스 남부 앨튼 지역에서 주 역사상 최악의 교통사고가 났다. 코카콜라를 실은 트럭에 들이받힌 주일학교버스가 도로 옆 자갈채취장에 빠진 참사였다. 아이들 21명이 익사했고 49명이 부상당했다.

 

러쎌 뱅크스(Russel Banks, 1940-)는 이런 재난의 현장을 뉴욕 주 북부에 소재한 (가상의) 소읍 쌤 덴트로 옮겨놓는다. 운전사는 학교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일에서 천직의 기쁨을 느끼며 20년간 무사고로 근무해온 것으로 설정되고, 통학버스에 오른 아이들도 14명이 모래 웅덩이에 빠져 죽는 것으로 각색된다.

 

“개―내가 본 것은 분명히 개였다. 아니, 봤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감미로운 저세상』[The Sweet Hereafter, 1991, 한국어판 윤인웅 옮김, 친구 1993. 최근의 판본으로는 『달콤한 내세』(박아람 옮김, 민음사 2009)가 있으나 평자가 전자를 따랐음을 밝힌다―편집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장편은 네명의 1인칭 화자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참사가 송두리째 바꿔놓은 각자 삶의 말 못할 사연과 비밀들을 들려준다. 순서대로 운전사인 돌로레스 드리스콜,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인 빌리 앤슬, 변호사 미첼 스티븐스, 사고의 생존자인 소녀 니콜 버넬 등이다. 첫 화자로 나서는 돌로레스가 마지막 화자로 다시 등장하여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달 수 있는데, 그녀를 통해 ‘이 세상’의 감당할 수 없는 비극에 대한 애도가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화자로서의 작중 비중은 정확한 셈이다.

 

모든 재난이 비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재난이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무너지는 억장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비극의 무게를 갖는다. 빌리가 말하듯이 그런 비극은 “생물학을 거스르고, 역사와 모순되며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심지어 물리학의 기본 법칙과도 어긋난다. 최후의 모순인 것이다.” 어떤 원인에서든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은 그런 모순과 대면해야 한다.

 

『감미로운 저세상』의 부모들의 경우, 내 아이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원인 규명을 하고 사고의 원인제공자들을 찾아내서 참사에 상응하는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만 한다. 그게 분명치 않다면 ‘희생양’이라도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건 법이나 정의 이전 문제다. 차라리 공동체가 존속하는 데 필수적인 하나의 상징적 제의(祭儀)에 가깝다. 가령 세번째 화자인 미첼은 그런 제의를 전투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인물이다.

 

사고라는 것은 없다. 나는 그 단어의 뜻을 모를 뿐더러 그 뜻을 안다고 하는 어느 누구도 결코 믿지 않는다. 나는 어디선가 누군가가 돈 몇푼을 남기기 위해 지름길을 택한 것임을, 그리고 이제 주 당국, 자동차회사, 마을 당국 등이 슬픔에 젖은 촌놈들과―회계사들이 내켜할 정도의―보상을 협상하기 위해 언변 좋은 인간들을 소집하느라 분주하다는 것을 알았다.(102면)

 

이렇게 단정하는 변호사 미첼은 누구인가? 마약으로 만신창이가 된, 좀비나 다름없는 딸을 둔 아버지. 마약 살 돈을 대주고 대주다가 급기야 딸로부터 에이즈에 걸렸다는 ‘최후통첩’을 받는 아버지. 그래서 쌤 덴트의 비극에서 삶의 활력소라도 발견하겠다는 듯이, 아이 잃은 부모들을 대표하여 정의라는 것을 구현하겠다는 듯이 이 사건에 변호사로서 개입하는 아버지. 하지만 미첼 외에도 ‘냄새’를 맡은 변호사들이 몰려들고, 마을은 소송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학교 당국을 고소하고, 주 당국을 고발하고 자동차회사에 배상을 청구하고, 그러다가 서로 위로하고 보듬어주던 사람들도 차츰 멀어져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을 불신하고…… 그러다가 변호사들을 받아들인다.

 

마을의 이런 정황은 아내를 암으로 잃고 쌍둥이 아이들마저 사고로 보낸 두번째 화자 빌리 앤슬의 독백을 통해 기술된다. 

 

그러면 돌로레스의 책임이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또는 저 말로우 도로의 가드레일을 교체하지 않은 뉴욕 주 당국의 책임이었나? 모래채취장을 파놓고 물이 고이도록 방치한 마을 도로관리 당국의 책임이었나? 버스 후미가 얼음물에 잠기는 동안 그 많은 아이들을 좌석에 묶어 둔 안전벨트는 책임이 없는가? 그러면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한 법률을 제정한 주지사의 책임인가? 누가 이 사고를 야기한 것인가? 우리는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가?(82면, 강조 원문)

 

하지만 작품이 이런 책임 묻기의 끝없는 연쇄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번져갈 기세인 소송들이 바꿔놓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자체를 들여다보는 데 집중한다. 끝 모를 슬픔의 심연과 먼저 가버린 아이들에 대한 기억들, 회한, 자책, 그리고 가난한 살림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꿈틀대는 내면풍경을.

 

소설로서의 애도

 

애도는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애도는 뒤에 남은 자가 자신의 여생을 온전하게 살기 위해 망자의 못다 이룬 삶에 바치는 지극한 예(禮)다. 슬픔이, 또는 분노가 지나쳐서 애도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를 다하지 못하는 한, 산 자의 한이 풀리지 않는 한 애도는 종결될 수 없다.

 

아이들의 무고한 죽음을 마을 사람들이 애도할 수 있게 되는 계기는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네번째 화자 니콜 버넬의 증언에서 나온다. 버스의 오른쪽 가장 앞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돌로레스가 과속했다고 증언함으로써 모든 소송들의 여지가 사실상 사라진다. 이 증언이 소송의 악몽에서 마을을 구하겠다는 일념이나 치료비를 얻어내려는 아버지의 바람에 부응해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콜이 아버지에게서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 증언은 그같은 학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빌리 앤슬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그의 쌍둥이 자식들을 ‘베이비시팅’해온 그녀의 애틋한 정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증언이기도 하다.

 

이 증언에 이어 돌로레스가 마지막 화자로 다시 나선다. 은둔생활에서 나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마을 축제에 참여한 그녀는 빌리에게서 니콜의 증언 내용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지만 사실상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이 증언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안도와 감사, 그리고 외로움.” 니콜의 거짓 증언이 그녀를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증언조차 은폐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돌로레스는 과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사고 당시 버스의 속도는 “시속 50마일, 기껏해야 55마일”이라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소송에 뛰어든 마을 사람들도 모두 알고는 있지만 외면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니콜의 거짓 증언이 증언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던 돌로레스의 진실이 된다. 그녀는 희생양이 되고서야 자신을 짓누르던 죄책감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다. 동시에 니콜의 거짓 증언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도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애도의 채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살던 실제의 그 마을은 어찌 되었다던가? 천문학적인 소송에 휘말리면서 유가족들 사이도 갈가리 찢어졌다. 심지어 사고를 낸 트럭운전사조차 트럭의 브레이크 결함을 이유로 들어 운수회사에 소송을 걸었을 정도였다. 350건의 소송에다 배상액만 1억 5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배상의 유혹에 굴복한 가난은 안식을 찾을 수 없었고, 그 비극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 않았다. 참사의 뒷수습이 그토록 참담했기에 러쎌 뱅크스도 작품 제목을 ‘감미로운 저세상’으로 지었으리라.

 

『감미로운 저세상』은 그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이 되었다. 부모를 비롯한 참사 관련자들의 끝없는 슬픔의 심연을 독자도 느끼게 하고, 애도의 예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무심한 봄, 우리에게는 여전히 불가능해 보이는 애도를. 이 화사한 봄, 여전히 짓밟히고 있는 그런 슬픔을.

 

 

유희석 /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2015.4.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