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하야시 후미꼬 『방랑기』
‘가난한 삶’이라는 환상문학
- 하야시 후미꼬 『방랑기』
하야시 후미꼬(林芙美子)의 『방랑기』(放浪記, 1930, 한국어판 이애숙 옮김, 창비 2015)는 가난이라는 가혹한 상황에 내몰린 작가가 일기로 써내려간 청춘의 연대기다. 1920~30년대 전후 일본의 궁핍한 생활상과 그 와중에 한 글자라도 더 써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작가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그녀는 고향에서 쫓겨난 어머니와 새아버지와 함께 여인숙을 전전하며 자랐으며, 어린 나이에도 물건을 끊어다가 행상을 하며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내몰렸다. 토오꾜오로 상경한 후미꼬는 여인숙과 직업소개소를 오가며 가난하고 비루한 삶의 더께에 시달린다. 돌아갈 고향도 안주할 집도 없는 그녀에게는 여행이 곧 고향이요, 푼돈을 긁어다 사 보는 체호프나 똘스또이의 책이 곧 집이다.
저 끔찍한 처지가 마냥 비참하게만 보이지 않는 까닭은 가난과 예술이 작가를 통해서 나름의 상호 타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배를 곯는 감각과 육신을 혹사하는 체험을 고스란히 예술의 동력으로 끌어다 쓰는 후미꼬의 문장에는 특유의 기지가 넘친다. 없는 돈을 털어 산 귀한 책들을 밥 한끼 먹기 위해 헐값에 되파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지인의 집 서재에 쌓인 책들을 보면서는 “혀에 침이 고”인다. “이 서적 더미가 이상하게 나를 유혹한다. (…) 한권을 팔면 얼마나 될까? 라면에 튀김덮밥에 초밥덮밥, 훔쳐내 주린 배를 채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259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부담스럽게 챙겨주는 남자를 향해서는 “앞으로 당분간은 밥 먹는 걸 휴업할까 생각 중이에요”(268면)라고 너스레를 떤다. 일본어로 번역된 하이네의 시를 읽으면서는 “번역은 밥을 다시 볶음밥으로 만드는 일일까?”(295~96면) 하고 자문해본다. 빈 위장을 경유해서 울려나오는 저 진솔한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면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빵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가난과 예술은 반목한다. 시를 써다 팔아서는 밥벌이가 영 시원찮다. 고깃집이나 까페 여급으로 들어가면 몸을 누일 한 뼘 공간도 얻고 입에도 간신히 풀칠은 하지만, 고된 노동으로 녹초가 되는 탓에 일행 시(一行詩) 한편 쓸 기력도 나지 않는다. 가게에서 나오는 밥을 “감사히 먹으면서도 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349면)을 지울 수 없다. 빵이 전부는 아니지만 빵이 부족한 사회에서 빵은 예술보다 값어치가 나간다. 인기 있는 슈티르너의 『자아경』은 1엔에 되팔리고,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50전도 감지덕지하다. 여덟면짜리 신문에 성병 약 광고는 크게 실려도 무명 여인의 시는 실리지 않는 것이 당대의 세태인바 오늘날과도 크게 괴리가 없어 보이는 저 풍경들은 혹 불변의 진리라도 되어가고 있는 걸까.
척박한 삶의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악순환 속에서 진실한 문장들을 건져올리고 의미있는 틀로 엮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후미꼬는 체호프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똘스또이의 위대한 작품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하지만, 정작 쓰는 것은 누에가 실을 뱉어내듯이 텅 빈 뱃속에서 게워내는 시와, 편집자의 눈치를 보아가며 잡지에 실릴 만하게 구색을 맞춘 동화일 뿐이다.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은 고단한 육신이 가로막아 “생활의 피로에 압도되어 오히려 환상만이 모락모락 피어나 눈앞을 흐리게 만드는 플롯”(424면) 정도밖에는 쓸 수 없는 것이다. 똘스또이가 백작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신은 구석에서 남몰래 맛있는 걸 먹고 있었군요”(374면) 하고 주눅 드는 장면은 애처로우면서도 심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작가들 태반이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사실은 곧 굶주린 예술의 한계를 반증하기에.
가난이라는 사상과 배고픔의 철학을 넘어
“나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동화와 시를 서너편 팔아본들 쌀밥을 한달 동안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배가 고픔과 동시에 머리가 몽롱해져 내 사상에도 곰팡이가 슬어버린다. 아아, 내 머릿속에는 프롤레따리아도 부르주아도 없다. 그저 흰쌀밥으로 만든 한줌의 주먹밥이 먹고 싶다.”(95면)
이념도 사상도 예술도 배고픔 앞에서는 가없이 사라질 뿐이다. 후미꼬가 겪는 어려움은 당대에 그가 교류한 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시인들의 사회주의란 가진 것을 ‘빚’까지도 함께 공평하게 나누는 데서 실현된다. 단팥죽이나 전골 따위를 나눠 먹고, 당장의 한끼를 때우기 위해 동전 몇닢을 빌리러 다니는 것이 문인들의 중요한 교류로 그려진다. 이 처절한 현실을 등지고 ‘어린애 속임수’ 같은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다다이즘의 유행에 후미꼬는 심기 불편해한다. 자신의 시를 다다이즘 시라고들 말하는 것에 불같이 역정을 내며, 삶이라는 토대를 무시하는 현학적인 예술을 향해 일침을 놓는다. “나는 나라는 인간에게서 나온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이즘으로 문학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저 인간의 연기를 뿜어내는 거야. 나는 연기를 머리 꼭대기에서 내뿜고 있는 거야.”(365면)
현실과 타협하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하는 후미꼬의 기개는 일상을 푸념하는 일기(日記)에 진정성을 불어넣고, 하이꾸(俳句) 류의 범속한 시에 깊이를 부여한다. 그럼에도 옴폭한 밥그릇의 깊이를 넘어서지 못하는 가난한 예술의 한계 또한 명백하다. 허기를 잉크 삼아 쓴 시가 다다이스트의 시보다 더 다다이즘 시 같은 점 또한 맥락이 통하는 듯싶다. 배가 고파 몽롱해진 머릿속에서 나온 시야말로 초현실적이고 전위적인 이 역설! 그녀에게는 해시시도 마리화나도 필요 없다. 슬프게도 가난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소설가 김성중은 상금을 받은 덕분에 지난 2년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용케 전업작가처럼 살았노라고 고백한다(『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가노트, 문학동네 2012). 찢어지게 가난했던 전후 시대에 감히 비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은 오늘대로 꽤 척박하다. “바다로 나갈 날만을 꿈꾸며 호수에 배를 띄우는 볼리비아 해군”(김성중 『국경시장』 작가의 말, 문학동네 2015)과 같은 오늘의 작가들을 밥그릇만한 호수로 내모는 현실의 질곡을 『방랑기』를 읽는 와중에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설마 이것이 다다이즘적인 연상법은 아니겠지? 비현실적인 현실을 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그리 멀지 않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이은지 / 문학평론가
2015.6.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