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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인권 감수성은 펜보다 무섭다

 

김영선

김영선

지난 2월 이후 한동안 트위터상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번졌다. 샤프(#) 기호 뒤에 특정 단어나 문장을 적는 해시태그는 원래 용이한 검색을 위한 기능이지만 사용자의 관심사나 지지를 드러내는 역할도 한다. 트위터를 달군 이번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은 팝칼럼니스트 김태훈의 칼럼에서 촉발됐다.

 

이 칼럼은 「IS(Islamic State)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그라치아』 48호)라는 도발적 제목으로 많은 이의 즉각적 반감을 사면서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수준의 여성혐오 발언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사실상 이 글은 여성주의에 대한 일부 좌파의 안이하고 왜곡된 시선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이 “1960년대 청년운동의 한 축으로 시작되었”으며 여성주의자라면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연대해 시스템의 붕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논조다. “방향이 틀어진 페미니즘”에 대한 좌파 남성의 충고는, 한국사회에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등장한 1990년대부터 이미 수차례 반복되어왔다. 그렇기에 김태훈의 칼럼에 대한 비판이 진보진영 내부의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지지 못한 채 단순히 여성주의자 대 여성혐오자의 싸움으로만 격화된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극에 달한 여성혐오 현상에 보내는 경고

 

하지만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적극적 선언은 극에 달한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이자 경고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서도 유의미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여성주의적 발언 앞에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가 비일비재하게 따라다녔음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이런 단서는 자신을 명명하는 단어의 정치성을 신중하게 고려해서라기보다 특정 정체성에 가해지는 사회적 낙인을 피하기 위해 붙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나는 ◯◯가 아니다’라는 거리두기 혹은 구별짓기가 낙인을 더욱 공고화하고, 차별에 저항해온 당사자들을 무력화한다는 점이다. 동성애 지지발언 앞에 흔히 붙는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솔직 과감하게 말하자면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청소년문학을 주로 담당하는 출판편집자이기도 하다. 편집자로서 단어와 문장을 깨끗하고 올바르게 쓰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데,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성주의적 관점과 맞물려 고민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대놓고 과격한 글이라면 외려 편하다. 혐오발언이라고 명확히 일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 인식 또한 최근 물의를 빚은 유명 가수의 ‘농담’이나 인기 개그맨의 발언 속에 어떠한 여성비하가 담겼는지 단번에 읽어내고 항의할 만큼 성숙해졌다. 그 항의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한국사회의 성별 이중잣대가 여전히 견고하다는 점이 드러났지만, 어쨌든 이런 발언은 즉각 분노와 냉소를 자아낸다. 그러나 진짜 절망하게 하고 화낼 기운마저 앗아가는 말은 혐오발언인지 아닌지 미묘한 언사, 배려 없이 무신경한 발언일 때가 많다.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행진을 멈추고)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장애인의 날 집회에서 “장애인에게 생일 같은 날” “우리 경찰관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처하라”라고 방송한 경찰(경향신문 2015.4.21)처럼 말이다.

 

원고에서 문제적 표현을 마주한다면?

 

편집자로서 고민이 깊어지는 지점도 여기다. 문장에 미묘하게 녹아든 혐오성 발언들은 연필 쥔 손을 한참 망설이게 만든다. 가령 ‘예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여성’ 같은 표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결정장애’ ‘무뇌아’ 등 걸핏하면 소환되는 장애차별주의(ableism) 언사나 ‘천상 여자’ 따위의 어구는 어찌해야 할까? 저자에게 다른 표현을 제안하는 것이 나을까, 문학적 표현으로서 존중하는 편이 옳을까? 

 

작중인물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현실언어를 실감나게 담으려는 명백한 계산하에 쓰인 표현이라면 존중해야 마땅하다. 맥락과 의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맥락에만 기대는 것은 다소 안이한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체로 주류 기득권의 관점에 익숙하기 때문에 어떤 맥락을 다르고 낯설게 읽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주류적 가치관을 확대 재생산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가해자의 흔한 변명을 떠올려보라.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무조건 면죄부가 주어지진 않는다. 게다가 특정 언사가 타인을 해할 수 있음을 간과하거나 무시했다는 점에서 이미 그가 지닌 정치성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경우를 마주한다. 예를 들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 ‘아직 애가 없는 부부’라는 표현에서 ‘아직’이라는 부사는 때로 별다른 의도 없이 달려 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말에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이성과 결혼하고, 결혼한 부부는 응당 아이를 낳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청소년들은 이런 문장을 통해 알게 모르게 기성세대의 편견을 습득한다. 무의식중에 축적된 고정관념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향한 대안적 상상력을 약화시킨다고 염려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내 나름대로 정한 원칙은, 저자가 의도치는 않았으나 혐오, 차별, 폭력, 편견의 언사로 읽힐 수 있는 표현은 가능한 한 수정을 제안하자는 것이다.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연결되는 ‘장애물’이란 단어는 ‘걸림돌’이나 ‘방해물’로 대체할 법하다. 군사용어인 ‘신호탄’은 그냥 ‘신호’로만 적어도 충분할 때가 많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인권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이런 수정이 사소해 보일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언어생활에 대한 고려 없이 지나치게 정치적 올바름에만 집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또 이같은 노력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예를 들어 ‘장애우’나 ‘어르신’ 같은 표현은 완곡어운동의 대표적 실패작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사자 스스로 자신을 지칭하거나 소개하는 데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적절한 말을 찾으려는 노력, 좋은 글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계속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게 나의 믿음이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 분노하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혐오발언을 손가락질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차별적 언사를 하고 있다면 아이러니가 아닌가.

 

“식민지 사람은 두개 언어를 해야 한다”는 파농(F. Fanon)의 말을 빌리자면, 편집자나 창작자도 두가지 언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배적인 언어를 알아야 혐오발언을 포착할 수 있고, 새로운 언어를 고민해야 이를 대체할 수 있다. 그 길은 어렵지 않다.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인권 감수성을 잃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권 감수성을 유지하라.’ 이것은 총칼보다 강한 펜처럼, IS보다 무서운 페미니즘의 지침이기도 하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에 수록되었습니다.

 

김영선 / 창비 청소년출판부 편집자

2015.6.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