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챙겨본 생각들
한국영상자료원이 상암동으로 옮긴 뒤 자주 찾는 편이다. 예전 한국영화들 말고도 이런저런 기획전이 훌륭하다. 극장 환경도 좋고 직원들도 친절하다. 잘은 모르지만 외국의 어느 씨네마떼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지 싶다. 게다가 무료다.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인 만큼 당연한 일인데도, 처음엔 이런 혜택을 입어도 되나 싶어 조심스럽기도 했다. 나라로부터 무언가를 받는다는 사실이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탓일 테다.
상영되는 영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관객은 노인들과 젊은 층, 두 부류다. 젊은 층은 영화 마니아이거나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인 듯하다. 영화사의 고전들, 육칠십년대 유럽 모던 영화들을 극장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치 않으니 열심을 낼 만하겠다. 당연히 수면욕과 인내심을 시험하는 영화들도 많다. 간혹 코를 고는 소리도 들려오고 중간에 투덜대며 자리를 뜨는 분들도 있다(최근에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가 거의 없어졌다). 아무래도 젊은 층에서 불만이 일 수밖에 없었겠다. 그럴 때면 ‘낀 세대’쯤 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곤 한다. 여기서도 드물지 않게 마주치는 기품있는 노년의 모습들에 나 자신을 투영도 해보면서 말이다.
만년에 향유하는 예술
그러다 얼마 전 내 마음을 꿰뚫린 것 같은 한 대목을 소설에서 만났다.
“일반적으로 노인과 영화의 관계에서는 나로서는 생각할 게 없는 것만 같았다. 인생을 영화 속에서 배운다고 하면, 이젠 주어진 시간을 다 써버린 저 영감님 같은 분에겐 영화를 봄으로써 후회나 아쉬움밖에 남을 감정이 없을 것이다. 후회나 아쉬움으로써 자신을 학대하는 취미를 가진 영감이 아닌 바에는 영화관까지 나를 질질 끌고 다니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물론 영감의 취미를 나는 알 도리 없다.”(「다산성(多産性)」, 김승옥 대표중단편선 제1권 『생명연습』, 문학동네 2014, 381면)
소설에서 화자인 신문사 기자 ‘나’는 부업으로 흥신소 일을 맡아 한다. 아무리 60년대라고 해도 드문 경우였지 싶은데, 아무튼 화자의 임무는 일당 오백원을 받고 오후 몇시간 동안 어느 돈 많은 노인의 뒤를 따르며 행적을 챙기고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는 것이다. 어느날 노인은 영화관으로 들어가고, 화자는 극장 휴게실 한쪽에서 노인을 몰래 지켜보며 짜증 섞인 상념을 이어가는데 그게 위의 인용 대목이다. 물론 예의 김승옥 소설들에 등장하는 자의식 과잉의 인물들에게서 자주 접하는 위악을 떠올려볼 일이겠고, 이 작품의 정황에서라면 화자의 자조(自嘲) 섞인 독설은 또 그것대로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런 맥락을 제하고 보면 ‘노인 혐오(차별)’ 발언으로 질책 받아도 할 말이 없는 대목이리라. 다만 저 상념이 누설하고 있는 섬뜩한 일면은 평소 나 스스로도 던져보던 질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기실 노년의 시간에도 얼마든지 인생이나 세상의 진실에 대한 열정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영화를 보든 문학작품을 읽든 그것이 반드시 ‘후회나 아쉬움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경로로 이어질 일도 아닐 테다. 그러나 나 자신 그런 동력이 떨어질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불안에 휩싸일 때도 있고, 그럴 때 좋은 영화나 좋은 문학작품을 접하는 일은 뭔가 쓰라리고 외면하고픈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은 가진 바 있다. 예술가에게 만년의 양식(樣式)이란 게 있을 수 있다면, 일개 독자나 관객에게도 그에 맞는 합당한 양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지금 다시 예술은, 문학은 무엇인가
이야기를 많이 에둘렀다. 내게는 아직 좋은 영화를 찾아서 보고 싶고, 좋은 문학작품을 찾아서 읽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인생을 영화 속에서 배운다고 하면,”의 그 맥락은 아직 내게는 유효하다고 믿고 싶다. 얼마 전 영상자료원에서 로베르 브레쏭의 <무쉐뜨>(1967)를 보면서는 시종 전율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무쉐뜨>는 내가 보기에 한 장면 한 장면이 인생의 비참과 고통에 대한 가장 담담하면서도 숭고한 표현이었다. 스크린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세상의 시간과 인간의 얼굴이 흑백의 빛으로 현전하고 있었다. 찢어진 수의를 두르고 거듭 강으로 굴러 내리는 무쉐뜨의 마지막 모습은 이 영화가 거의 보여주지 않은 비참과 고통의 반대지점을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쨌다고,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사실 김승옥 소설이 무심하게 흘린, 영화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는 태도에는 그 기저에 ‘표현된 예술’에 대한 오래된 존중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대의 여건과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내 성장기의 경우로 말하자면 그 대상은 ‘문학’이었다. 어떤 상황이나 세계가 문학작품의 언어, 그 표현을 통해 처음 거기 존재하는 것처럼 명료해지는 순간의 감흥은 여전히 나에게 가장 큰 인식적, 감각적 즐거움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복잡성과 유한성, 타자라는 존재, 더불어 사는 것의 의미, 공동체의 운명 등등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테다. 어쨌든 언제든 무언가를 물어볼 수 있는 기준이었던 셈이다. 십여년 전부터는 그 자리에 영화의 목록이 더해졌지만 내게는 어느 지점에서 그 둘은 하나다. 그리고 이런 나의 태도는 문학판 언저리에서 생활해오면서 관성처럼 굳어진 측면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내가 자랄 때도 얼마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문학은 세상의 중심에서 멀찍이 밀려나 있다), 나의 딸과 아들은 또 그들의 방식으로 무언가에 기대고, 그들만의 지도를 찾아가며 살아갈 테다.
한국문학의 제도적 현실, 행로를 두고 쓴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구든 말할 수 있는 사안이고 다 경청해야 할 말들일 테지만, 한마디만 하고 싶다. 지금, 누가, 왜 문학을 필요로 하는가. 문학은 왜 있어야 하는가. 지금 문학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다만 이미 답을 가진 채 묻지 않아야 하리라. 의미있는 비판의 가능성은 적어도 이 질문들을 경유할 때만 열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5.7.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