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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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감정과 사유라는 이분법을 넘어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namjadeul2009년.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버지니아 울프가 추구했던 불확정성의 글세계를 옹호하는 긴 칼럼을 썼다(이 책의 6장「울프의 어둠」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8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 내 여성대학인 뉴넘대·거턴대에서의 초청강연을 바탕으로 책을 낸다. 제목은 『자기만의 방』(1929)이었다.

 

제대로 읽지 않은 자를 향한 솔닛의 유머를 그대로 빌리자면, 이 고전은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만 기억되는”(144면) 책이다. 허나 『자기만의 방』은 일찍이 ‘맨스플레인’(mansplain, man+explain.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무언가를 잘난 체하는 태도로 설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합성어)이란 화두를 끄집어낸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울프는 글을 쓰고 싶은 여성을 위한 최적의 마음상태는 무엇인지 논한다. 그러면서 여성과 글쓰기를 둘러싼 물질적 곤경과 비-물질적 시련을 고찰한다. 울프는 세간의 분위기를 예민하게 짚어내며, 글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여성을 불편해하는 정서를 언급한다. 여기엔 여성에게 오롯이 평정을 요구하는 남성, 여성이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거론되는 삶은 여성 본인에게 불행하다고 훈계하는 남성이 있었다.

 

남성은 사유하고 여성은 느낀다?

 

신조어는 대개 유행의 유통기한에 휩쓸려 사라진다. 어쩌면 ‘맨스플레인’도 그런 운명의 범주에 속할지 모른다. 허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 한국어판 김명남 옮김, 창비 2015, 이하 『맨스플레인』)와 『자기만의 방』을 같이 읽다보면, 이 조어는 실제로 오랜 역사와 생명력을 축적해왔음을 알게 된다. 솔닛이 『맨스플레인』을 통해 펼쳐 보이는 시야는 꽤 넓다. 그녀는 책을 통해 젠더와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 중인 ‘사유: 남성의 것=감정: 여성의 것’이라는 인식에 대항한다(이 생각은 일찍이 수전 손택이 조너선 콧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7장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에서 솔닛은 1970년대 캘리포니아를 다룬 자신의 글을 비난한 남자의 견해를 소개한다.

 

“당신은 FOX 채널 뉴스 기자만큼이나 빈약한 ‘증거’를 갖고서 현실을 넘어 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느낀다는’ 이유로 진실이라고 말합니다.”(172면)

 

솔닛은 졸지에 “느낌을 생각이나 지식으로 혼동하는 사람이 되었다.”(173면) 이는 비단 솔닛이 살고 있는 미국에 국한된 현실은 아닌 듯하다. 지성의 역사에서 여성이 끼친 무수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식장 내부에서는 여성에게 ‘맡기면 좋을 법한 말과 글’이라는 식의 안일한 분류법이 작동하는 것 같다. 쓰인 맥락은 좀 다르지만 솔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할당된 배역”(12면)이 있다고 가정한다. 여성은 생활 가운데 감성, 기분, 느낌을 끄집어내는 고백자로 쉬이 규정된다. 그러한 고백은 다소 ‘들떠 있는 호소’로 폄하되곤 한다.

 

감정과 사유는 별개의 문제라는 인식은 정작 여성의 글은 ‘논지가 허약하지만’ 귀담아들어볼 감수성이 내재된 개별 사례집으로 평가받는 구조를 낳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 호소를 ‘차분하게’(?) 해석해줄 남성 해설자(commentator)라는 관계가 동시에 설정된다. 논리의 부재라는 핸디캡을 ‘감안하고 경청하자’는 식의 일방적 배려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앎을 한쪽 성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이미 마음속에서 앎의 형태를 판정해버린 채 듣는 태도 또한 남녀 간에 지적 위계가 있다는 편견을 부추긴다. 솔닛은 이같은 편견을 극복하고자 ‘이지적’이라는 특색에 담긴, 감정적으로 거리를 잘 두는 능력이 남성의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몸소 뒤집어본다.

 

다시, 통제의 체계를 묻기

 

『맨스플레인』은 수전 손택이 성별과 글쓰기란 구도에 내재되었다고 간파한 ‘심장과 머리, 사유와 감정, 판타지와 분별’ 같은 이항대립을 의식하면서 사례들을 소개·분석한다. 장마다 솔닛은 오늘날 수많은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혐오 현상과 피해자의 폭로가 낱장의 수기로만 소비되지 않도록 “여성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198면)을 논증해나간다. 논증 과정에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과 그로 인한 불평등을 ‘세상에 이런 일이’로 취급해버리고 마는 사회를 향한 위트가 담겨 있다(일례로 3장 「호화로운 스위트룸에서 충돌한 두 세계」에서 전 IMF 총재 도미니끄 스트로스깐의 추문에 대한 그녀의 비판을 보라). 특히 솔닛의 이런 위트에는 자신이 주목하는 테마에 대한 근거있는 자료 제공·수치 제시가 동반된다. 이 위트는 ‘일갈의 논리’로 다가온다.

 

솔닛의 일갈은 9장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에서 더욱더 예리해진다. 특히 그녀가 이 장에서 소개하는 ‘여성경력주의’라는 조어는, ‘치명적인’이란 표현이 여성을 어떻게 이중적으로 속박하는가를 보여준다. 맨스플레인이 자신의 지식을 투자해 섹스어필 하고픈 치명적인 여성상이라는 남성의 환상을 비판한다면, 여성경력주의는 여성의 앎과 일에 대한 추구가 남성의 그것에 치명타를 남기기 위한 도구라는 환상을 비판하는 데 쓰인다.

 

저자의 통쾌한 일갈과 위트 속에서 『맨스플레인』은 앎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태도의 조심성 문제를 벗어나, 다시 한번 여성의 말과 글을 여전히 ‘해석되길 기다리는 한낱 호소’로 치부해버리는 정서를 비판한다. 그런 가운데 성별과 지식의 배치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사유와 감정은 어쩌다 분할된 것이라는 견해를 낳았는지 물음을 야기한다. 이 물음은 여성이 ‘무릅쓰고’라는 표현을 의식하며 글을 써야 했던 옛 시절, 자신의 표현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리란 절망이 외려 글을 쓰는 동력이었던 모순을 본 울프의 성찰과 닮아 있다. 오늘날 표현할 때와 곳은 늘었지만 이 질문이 마냥 진부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자유가 선사하는 교묘한 사회적 예속은 또다른 침묵의 페이지에 여성을 여전히 가두려 한다. ‘너의 증언, 기록, 고백을 듣긴 할게. 사유가 없는 감정이라 할지라도’ 같은 통제의 체계 속에서.

 

 

김신식 /  감정사회학도

2015.7.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