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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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지구사·평화사 맥락의 한국전쟁 연구
-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panmoonjum이 책 『판문점 체제의 기원』(후마니타스 2015) 한국전쟁을 “전쟁의 기원”이 아닌 “평화의 기원”이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접근한다. 한국전쟁의 종결을 둘러싼 국제법적 논의들을 지구사적 차원과, 평화기획이라는 지성사적 차원에서 분석하며, 흔히 ‘정전체제’ ‘1953년체제’라 했던 ‘판문점체제’의 성격을 조명한다. 

 

저자 김학재(金學載)는 근대 자유주의 평화기획을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으로 나누어 그 개념과 역사를 지구사적 맥락에서 밀도있게 서술한다(제1부). 여기서 칸트적 기획이란 유엔 같은 국제기구와 국제법을 바탕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말한다. 민족주의, 국가이익보다 국제협력과 보편성을 강조한다. 또한 군사동맹보다 집단 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추구한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이상주의, 윌슨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홉스적 기획은 일단 인간세계에서 분쟁과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군사동맹과 영향권(sphere of influence) 설정 등으로 권력균형을 추구하는, 기본적으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현실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저자는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의 차이와 균열을 충분히 드러내지만, 이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양자가 상호 대립하면서 때로는 서로 겹치고 결합하는 양상에도 주목한다.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2차대전 이후 칸트식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상승되는 ‘자유주의적 순간’(liberal moment)이 도래했고, 이는 유엔의 창설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편 이 시기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형성되는 국면이기도 했다. 냉전은 철저히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홉스적 기획이 압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자유의 범위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을 제한하는 배제/포섭의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 저자는 자유 진영과 파시즘 진영의 대립이라는 2차대전의 이분법적 국제질서관이 다시 자유 진영과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이라는 냉전구도로 이어지는 측면을 주목한다. 칸트적 기획도 냉전이 형성되는 데 기본 바탕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이처럼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이 겹치는 냉전의 형성기에 발생하였다. 이 책은 전쟁의 종결을 둘러싼 제반 논의와 정책들이 전쟁상황의 변동에 따라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으로 변덕스럽게, 대단히 어지럽게 오가는 양상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다(제2부). 그 결과 형성된 판문점체제는 기본적으로 홉스적 기획의 산물이지만, 두 평화기획 어디에도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현존 질서 유지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강박에 의존해 60여년간 지속된 불안하고 유동적인 군사 정전체제(542면, 강조는 저자)라고 규정한다. 또한 한국전쟁기에 쌘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동아시아 각국이 미국과 양자적 군사동맹을 체결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을 규명하며, 이 역시 홉스적 기획이 압도한 것이라 본다. 현재 서구에서는 나토와 유럽연합 등 지역적 협력이 존재하지만 동아시아에는 영토분쟁 등 19세기적 민족주의 갈등이 계속되는 현상(‘아시아 패러독스’)도 한국전쟁 및 그 결과로 만들어진 판문점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홉스적 기획이 압도하는 현상을 칸트적 기획이 왜곡되거나 실패한 결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한국전쟁기 포로교환 과정을 분석하면서 오히려 칸트식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여기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정전협상에서 유엔군 측이 내세운 포로의 이른바 ‘자유송환’ 원칙은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칸트식 사고를 투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유송환을 위해 포로들을 심사하고 분류하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처참하고도 잔인한 폭력을 가져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자유주의 평화기획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뒤르껨(E. Durkheim)의 사회적 연대를 통한 평화를 대안적 평화기획으로 제시한다. 

 

이 책에서 다소 아쉬운 점은 ‘정치’의 실종이다. 칸트식과 홉스식 기획이 교차하는 과정은 실제로 초국가적으로, 또는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제반 정치·사회집단들 사이의 갈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저자는 한국전쟁의 기원론에 초점을 둔 기존 연구들이 전쟁의 책임을 묻는 형법적 시각에 매몰되었다고 지적하는데, 평자로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전쟁의 책임을 묻는 연구가 ‘기원’보다 ‘발발’을 더 강조했다는 형식논리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 기원론의 초점은 책임 소재보다는 전쟁을 발생시킨 갈등의 기원, 또는 그 갈등의 성격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내전론자로 분류되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며 전후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과 민족혁명·토지혁명을 추진하는 한국 민중의 갈등, 또한 이와 함께 미국 내부의 국제협력과 신탁통치를 주장한 국제주의자(칸트적 기획)와 미국의 국익을 힘을 통해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한 민족주의자(홉스적 기획)의 갈등을 그려냈다. 그런데 김학재의 서술에서는 누가, 어떤 집단이 특정 형태의 평화기획을 주도했는지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 전쟁 책임론을 벗어나기 위해 너무 탈주체화된 서술을 하다보니 탈정치화의 문제가 발생하는 양상이다. 

 

저자는 판문점체제 및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마땅히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한반도 통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및 침략전쟁에 대한 청산)의 해결을 배제하거나 유보하는 ‘탈정치화’를 특징으로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책의 판문점체제에 대한 성격규정은 정전협정과 미국과의 양자 군사동맹 등 주로 군사적 측면이 강조되고, 일부 발전주의 같은 경제적 측면을 언급하는 데 그친다. 한반도 분단은 한반도 내외를 관통하는 여러 정치·사회집단 사이에 맺어지는 특정한 정치적 관계, 예컨대 ‘적대적 의존’ 등을 통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담론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많은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이 점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그러하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판문점체제’는 ‘정전체제’ ‘1953년체제’를 대체할 수는 있어도, ‘한반도 분단체제’를 대체하거나 이를 전면적으로 새롭게 설명한 용어는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새로운 세대의 한국전쟁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반도의 문제를 일국적 시각이 아닌 지구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는 한편, 철학·법학·역사·사회학 등을 넘나드는 학제적 연구라는 측면에서 놀라운 큰 걸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관한 한 어떤 전범(典範)을 보여준 저작으로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홍석률 /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2015.8.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