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로버트 달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
‘기업민주주의’ 없는 재벌·노동시장 개혁은 빈곤하다
-로버트 달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
8월 임시국회가 다뤄야 할 과제는 노동시장개혁과 재벌개혁이다. 새누리당은 노동시장개혁의 목표를 청년 일자리 창출로 잡고 있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노동시장개혁 의제를 재벌개혁으로 확대해 ‘경제민주화 시즌 2’로 몰아갈 태세다. 새정연은 때마침 터진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사태를 계기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정책을 확대한다는 계산이다.
이 두 과제는 자본과 노동 간의 배타적 이익이 충돌함과 동시에 상층의 자본과 노동이 담합하여 중하층 자본과 비정규직 노동을 수탈하는 복잡한 균열선도 있어 문제해결이 까다롭다. ‘이익집단정치’가 아닌 경제민주화와 공공선에 도달할 수 있는 균형적 방법론이 중요한 이유다. 여기에 도움을 주는 책이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A. Dahl)의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A Preface to Economic Democracy, 1985, 한국어판 배관표 옮김, 후마니타스 2011)이다.
'다원민주주의'의 한계를 꼬집다
이 책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첫째, 노동시장개혁과 재벌개혁을 동시에 균형있게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시사점을 준다. 저자 달에게 경제민주주의의 본령은 ‘기업민주주의’이다. 스웨덴 노조가 ‘연대임금제도’를 통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대신 임금인상분을 기업의 공동주식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임노동자소유기금’ 사례에서 힌트를 얻었다. 저자는 스웨덴 노조의 기업참여와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기업처럼, ‘법인기업(주식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유와 경영에 참여하여 민주적으로 통치하는 ‘자치기업’(self-governing enterprise)에서 해법을 찾을 것을 촉구한다.
둘째, 최근 2세대 진보를 표방한 조성주씨가 정의당 대표 경선 출마선언문에서 밝혔던 것처럼, 진보정치와 노동운동이 놓치고 있었던 “민주주의 밖 시민들과 노동운동 밖의 노동자들”의 문제를 구제하는 데 실마리를 준다. 저자는 초기 저작에서 주장해왔던 ‘이익집단정치를 통한 민주주의’ 즉, ‘다원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한계를 반성하고, 신노선으로 ‘경제민주주의’를 주창한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에서 달의 영향을 받아 진보정치와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다원민주주의 노선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측면도 있다. 한국에서 ‘노동있는 민주주의’와 ‘대중정당모델’을 중심으로 다원민주주의 노선을 정립한 대표적인 학자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저자인 최장집 교수다. 달의 노선전환은, 한국의 ‘노동있는 민주주의’ 노선이 대기업의 정규직과 조직노동을 과대 대표하고, 역으로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및 청년노동을 과소 대표하는 실태를 개선하는 데 큰 시사점을 준다.
책의 1장(평등은 자유를 위협하는가?), 2장(민주주의, 정치적 평등 그리고 경제적 자유), 3장(민주주의와 경제 질서)에서 저자는 다원민주주의의 전제인 자유와 평등이 이분법으로 모순되지 않고 보완관계를 맺음으로써 민주주의와 평등이 병행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4장(기업 내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에서 저자는 자원과 소득이 불평등한 ‘법인기업에 의한 자본주의’에서는 민주주의와 평등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5장(소유, 리더십 그리고 자치기업으로의 전환)에서 저자는 이러한 양립 불가에 대한 처방으로 ‘자치기업으로의 전환’을 제시한다. 그는 전환을 위한 국가정책으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은행을 통해 자금융자, 지급보증, 조세감면 등의 조치를 취할 것과 국가가 법인기업을 인수한 후 노동자들에게 매각하여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달은 초기 저작인 『누가 지배하는가?』(Who Governs?)에서, 미국 뉴헤이븐 지역의 다양한 이익단체들이 결사체를 구성하여 경쟁하는 것을 근거로 전통적인 ‘소수엘리트에 의한 지배’(minority rule)이론을 비판하고, 정책영역별로 ‘소수자들’(minorities) 간의 다원적 경쟁을 강조하는 다원적 민주주의(minorities rule)를 주장했다. 그의 핵심적 가정은 시장에서의 다양한 경쟁과 갈등이 민주주의를 가져온다는 원리, 즉 ‘민주주의에 대한 자유시장주의적 접근’이었다.
하지만 그의 다원민주주의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독과점과 불공정거래의 모순을 숨긴 채 시장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결국 공공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정한 것처럼, 파벌 간 이익집단정치의 문제점을 은폐하고, 이익집단 간의 경쟁과 갈등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본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원주의를 비판한 이론가들은 소수 상층계급의 배타적 이익수호를 위한 응집력과 다수 하층계급의 응집력은 힘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이익집단 간의 다원적 경쟁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층계급의 이익을 과대 대표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피할 수 없거나 소수 엘리트 지배를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제민주화와 공공선에 도달하는 길은
이에 달은 이러한 비판들을 『다원민주주의의 딜레마』(Dilemmas of Pluralist Democracy)라는 저서에서 수용했고, 결국 자기 이론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최후 저작인 이 책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를 썼다. 저자는 경제민주주의 없이는 다원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다원민주주의를 수용했던 최장집 교수를 필두로 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는 자기한계를 수정해간 달과 달리 문제점을 교정할 시간을 잃었다. 결국 경제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없는 다원민주주의는 자본과 노동 간의 대립각을 크게 부각함에 따라, 나머지 노동자 간의 이익차이와 갈등을 축소·은폐하였다. 비정규직을 과소 대표하는 민주노총 중심의 ‘노동있는 민주주의’가 민주 대 반민주 또는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하층노동이 소외되면서 상층노동을 과대 대표하는 대중적 진보정당의 한계를 은폐시켰다.
결국 이러한 다원민주주의는 상층 노동자·엘리트의 이익을 과대 대표하는 이익집단정치로 흘러 국가의 공공선과 사회정의를 위협하게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정규직과 청년노동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업민주주의를 제시하지 않는 한, 다원민주주의적 이익대표체계(정당체계와 정당모델)는 386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 노동자의 이익을 과대 대변하는 ‘강자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된다.
채진원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비교정치학
2015.8.1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