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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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분권화 개헌이 새 시대의 문이다

이일영

이일영

눈부신 오월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사를 지하철 안에서 접했는데 눈가에 물기가 맺히는 것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우리들 청년기의 오월은 부끄럽고 비장했던 기억뿐, 봄의 기억이 없다. 지난 몇년 간에도 원통한 죽음들을 어찌하지 못한 자책과 우울과 분노가 쌓여왔다. 이제 이런 봄도 있구나 싶다. 얼마간은 함께 카타르시스의 시간을 느껴보고 싶다.

 

작년 내내 많은 국민들은 이게 나라인가 분노하면서 나라가 더 망가지는 것을 막으려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과연 새 정부가 새 시대의 첫차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걱정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정권교체를 열망하면서도, 과거와 같은 정치세력 간 적대와 분열이 계속될 수 있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선거 직후의 허니문 기간이 끝나고 구체적인 정책성과를 보여줘야 할 때가 되면 갈등적 구도가 재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대통령의 5·18 기념사는 이러한 우려를 상당 부분 덜어주고 있어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저의 공약도 지키겠습니다. 광주정신을 헌법으로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열겠습니다”라는 대목이었다. 문대통령은 여야 5당 원내대표와의 회동에서는 선거제도 개편, 권력구조 분권화에도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다. 당장의 권력 행사에 연연하지 않고, 야당들에 먼저 손을 내밀어 개헌 이슈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대교체의 의지, 비전과 제도로 나타나야

 

이제 적대적 양당체제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열렸다. 지금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는 것은 자칫 이념적·지역적 분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잠시 미루어두어도 좋다고 본다. 아직 5·18정신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충분하지 못한 세대와 지역도 있을 수 있다. 이들을 배려하는 것도 5·18정신이다.

 

미래를 위해 시급한 일은 소수파를 포용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편에서 과거의 적폐에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새 시대를 여는 공존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도 중요하다. 개혁을 위한 통합, 통합을 위한 개혁의 흐름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광주정신으로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온 전국의 5·18들을 함께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단기적인 정치공학적 이해를 넘어 촛불민심을 따르는 것이 새 정부의 성공 가능성을 더 높이는 일이다.

 

촛불혁명과 정권교체,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결의는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투표의 비례성을 높이고 소수파에게도 권한과 책임을 배분하는 분권화 개혁은 새 시대를 여는 관문이다. 분권화 개헌은 보다 균형적인 발전 모델을 뒷받침하여 새 시대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다. 선진국들 사례를 통해서 보면 분권화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가 좀더 평등한 분배 결과와 연관된다는 주장이 많다. 분권화 개헌은 균형성장과 경제민주화를 뒷받침하는 제도환경을 마련하는 중대 개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간 공약했던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고집하지 않고 분권형 대통령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은 매우 중요한 진전이다. 지난 시절 제왕적 대통령제가 예외 없이 실패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실패를 더 반복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사회계층의 이익을 잘 대표하고 폭넓은 협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로 이행해야 한다. 현재의 국민여론을 감안하면 의원내각제로 개헌하는 안은 현실성이 크지 않은데, 그렇다고 기존의 대통령제 골격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도 미봉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분권형 대통령제, 즉 내각이 대통령과 의회에 함께 책임을 지는 이원정부제로 전환하는 길이 남는다. 여기에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해야 한다.

 

불균형성장 모델이 장기침체 속에서 악화되는 추세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연방주의의 비전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국가 비전은 개헌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분권화 개헌은 혁신과 일자리의 성과를 가져오는 비전 및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작업이다. 상당수 선진국들에서 중앙정부와 대기업 이외의 다양한 자원을 활성화하는 도구로 연방제가 이용되고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 성장, 고용, 분배의 성과가 좋게 나타나는 경향이 보인다.

 

새 정부의 핵심 공약은 일자리 공약과 자영업자·소상공인 공약이다. 일자리위원회를 만들어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일자리 81만개를 창출하고, 4차 산업혁명 위원회를 구성하여 관련 인프라 투자를 행할 계획이다. 중소기업청을 중소벤처기업부로 개편하여 중소·벤처기업 지원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한 공약 사항이다. 그러나 고용, 기술, 산업 정책을 종합적으로 연계하는 비전과 모델은 제시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설된 조직과 기존 부처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고, 예상치 못한 효과들이 나타날 것이다. 새 정부가 수량적 목표를 앞세워 밀어붙이기보다는 비전을 수립하고 정책조정 체계를 정비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좋다.

 

분권화, 새 시대의 정치·경제 기반

 

지역 현장에서 보면, 중앙의 부처나 사업추진기구들이 마련한 지시적 정책이 난마처럼 얽혀서 지역의 자생력과 성장력을 억압하는 일들이 많다. 하향식의 일률적인 사업 추진 패턴으로는 재정을 낭비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청와대나 중앙부처에서는 비전 설정 기능만 맡도록 하고, 구체적 사업은 규모의 경제를 갖춘 지역 단위에서 입안하고 추진하는 방식을 취할 시점이 되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추진되었던 ‘5+2 광역경제권’ 정도의 규모를 염두에 두는 것이 현실적이다. 가능한 곳부터 광역경제권 기구(또는 지역개발청) 설립을 추진하는 것이 일자리 문제나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새로운 시대의 방식이 될 수 있다.

 

혁신과 고용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광역경제권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를 헌법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 우리가 미국처럼 각급 정부에 권력이 중첩되는 방식으로 이행하기는 어렵다. 독일처럼 헌법에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헌법 개정에 앞서 지자체 단위를 통합하는 것도 지난한 일이다. 우선 광역경제권 기구가 작동하도록 하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다. 지방자치 헌법 조항(헌법 제117조)에 광역경제권 사무를 수행하는 기구를 둘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할 것을 제안해본다. 이러한 헌법 조항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기능적 상호의존 영역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적폐는 청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에만 매달리면 새 정부는 구시대의 막내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새 시대의 맏이가 되려면 미래로 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 분권화 개헌으로 국가운영의 틀을 바꾸어야 혁신과 고용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발전 모델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분권화 개헌은 새 시대를 여는 문이다.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2017.5.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