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촛불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향하여
지난가을 첫 촛불집회로부터 올해 5월 9일 19대 대통령선거에 이르기까지 숨가쁜 시간들이 지나갔다. 사회는 항용 예측 밖의 궤적을 그리며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정말 건너보지 않은 강을 건넌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을 촉발한 박근혜정부의 비리와 무능과 태만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비선’에 의존한 정책과 인사, 경제·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부문에 걸친 대규모 부패, 민주적 소통과 책임의 방기, 세월호참사나 메르스사태에서 드러나는 국가 능력의 심각한 후퇴 등 일일이 지적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런 박근혜정부에 대해 시민들은 지난해 총선을 통해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북’몰이와 호전적인 대북정책으로 정치적 궁지를 공격적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엄청난 규모의 열정적 참여로 민주공화정의 근본원리를 정면에서 부인하며 폭주하던 박근혜정부를 막아낸 것이다.
반년 정도 계속된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다음 세가지 준칙을 따랐다. 1) 구호는 강건하고 비타협적이되, 2) 행동에서는 높은 수준의 자제력을 발휘하며, 3) 열정적 참여를 견결하게 이어가기. 이런 준칙에 입각해 촛불시민들이 추구한 것이 현 체제, 그러니까 87년체제의 해체와 전복은 아니었다. 촛불시민들은 오히려 87년체제 안에 새겨져 있는 제도적 절차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압박했는데, 그것은 건너본 적 없는 강 앞에서 머뭇거리는 제도적 행위자들이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부교(浮橋)를 설치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렇게 제도 외부의 압력으로 제도 내부의 절차를 작동케 하는, 외압내진(外押內進)이라 요약할 수 있는 과정에 의해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와 특검법 통과, 특검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그리고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보궐선거라는 강을 건넌 것이다. 시민의 직접행동이 제도적 절차를 격발하고 그렇게 해서 가동된 절차의 진행에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연료를 공급했던 이 과정은 보수정당의 분열을 유도했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통해 정권교체라는 제도적 결실을 맺었다. 이로써 촛불혁명의 첫번째 단계가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마땅히 촛불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촛불이 이룬 성과만으로도 참여자인 우리들은 기쁘고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우리들 각자가 밝혔던 촛불이 그려낸 거대한 점묘화는 숭고한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혁명은 자유를 한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하고 사회적 궁핍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의 토대를 공고히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면 촛불혁명은 87년체제 아래서 이루어진 최량의 정치적 성과 중 하나지만, 현재까지는 87년체제의 수호에 머무르고 있다. 촛불‘혁명’이 그 이름에 값하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법 분명한 것 같다.
첫째, 자주 이야기되었던 ‘적폐청산’이 있다.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가 추진한 잘못된 정책의 폐기는 물론이고, 그런 잘못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배상 및 보상을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의 첫머리에 놓여야 할 것은 의당 세월호참사이거니와, 검찰과 국정원 개혁, 일본정부와의 위안부 합의나 사드 배치, 그 외에도 4대강사업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적폐청산이 필요하다. 둘째, 적대적인 대북정책으로 인해 심화된 안보위기를 해결하고 그간 중단된 남북한 교류협력을 복원하는 일이다. 셋째, 새로운 경제 모델을 모색하는 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부른 한 축은 국가권력과 재벌의 부패동맹이었다. 촛불민심이 그런 대통령을 탄핵하고 재벌총수를 재판에 회부한 사실이 뜻하는 바는 이제는 우리 사회가 박정희체제로부터 완전히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런 과제를 이룩하기 위한 정치적 토대와 지지기반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확대해야 하며, 그것에 입각해 정치제도 및 정당체제 전환을 이뤄야 한다.
지금까지의 촛불혁명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런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 진입로에 들어서기는 했다. 하지만 그 길을 제대로 주파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적폐청산 가운데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쉽고 말끔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말끔하게 마무리되기 어려운 것도 많다. 신산한 근현대사의 여러 굴곡을 생각하면 청산되어야 할 것의 목록은 매우 길어지는데, 길어지는 그만큼의 신중함과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확립하는 일도 이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포용정책으로의 복귀를 통해서 이루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의 핵·경제 병진노선에 대응할 수 있는 포용정책 2.0 그리고 남북연합의 구상과 실천이 요구된다 하겠다.
‘박정희체제에서 탈피하기’도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그것은 재벌중심경제로부터의 탈피를 넘어서 성장에 중독된 삶에서의 탈피, 주거·교육·의료가 공급되고 소비되는 방식의 근본적 재편까지 포괄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와 미시적이고 다원적인 혁신을 결합하는 경제 형성이 필요하고 그에 맞게 국가의 역할도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과 여야 간의 협치문화 형성을 비롯한 정당체제 전반의 개혁을 통한 정치적 전환 또한 끈기있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런 작업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공유된 규칙 아래서 벌어지는 정치적 경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려는 분단체제의 수구세력을 공론장에서 추방하고 정당체제 변방으로 멀리 밀어내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랫동안 수구정치세력에 납치된 상태로 머물러 있던 보수적 시민들의 각성 또한 요구된다. 물론 오래된 관행과 결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선택 가능한 정당 없이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수구와의 분리를 지향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하는 보수정치세력 형성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촛불혁명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이런 과제에 직면해 필요한 일은 지금까지 촛불혁명이 지켰던 세가지 준칙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강도의 면에서는 비상한 국면을 통과했던 촛불혁명의 첫 단계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며, 오히려 좀더 일상화된 방식을 찾아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 지향의 면에서는 한결같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앞서 지적한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의지의 수준에서는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하지만, 개혁성과가 조급히 가시화되길 바라는 마음을 다스리는 자제심을 발휘하며, 개혁작업의 정치적 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참여태세를 이어가야 한다. 이는 촛불혁명이 채택해온 외압내진의 개혁방식 때문에도 더욱 요구된다. 그런 방식의 선택은 새로운 정부를 선출한 뒤 방치하고는 정치적 요구 수위만 높여가는 과거 행태와 결별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출된 정부의 행로를 지지하고 비판하고 견인하면서 제도적 절차를 지키는 침착한 개혁을 하나하나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촛불시민들이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신발끈을 매고 개혁작업의 불침번 노릇을 자임할 의지를 가진다면, 이제 30주년을 맞은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과제 또한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87년체제가 자신이 열어놓은 민주적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한 촛불혁명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고 즐겁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7.5.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