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스파이더맨을 ‘또’ 보아야 하는 이유
두번의 리부트, 세번째 피터 파커
결국 나는 보고야 말았다, 세번째 피터 파커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이모부의 죽음을 계기로 정의에 대한 물음을 거쳐 자아를 정립해가는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 3부작(2002~2007)은 히어로물로서는 드물게 내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고 이에 많은 호평을 받았다.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2012, 2014)은 아버지의 유품을 단서로 자신의 근원을 추적하려는 진지한 서사와 더불어 보다 화려한 비주얼로 무장했지만 토비 맥과이어의 그림자를 극복하지 못했고, 심지어 채 완결되기도 전에 엎어져버렸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톰 홀랜드가 분한 스파이더맨은 밖으로 돌기를 그만두고 마블의 세계로 화려하게 ‘홈커밍’하였다(「스파이더맨: 홈커밍」, 2017). 영화 안팎으로 소진될 대로 소진된 이 불행한 캐릭터를 다시는 마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나는 왜 또 보고야 말았나.
명멸하는 제국의 상상적 팍스 아메리카나
마블의 히어로이면서 마블 시리즈의 거대한 세계관 바깥에서 자기만의 서사를 계속해서 뻗어나갈 것만 같던 이 어린 탕자의 귀환은 혹독한 신고식을 거쳐야만 했으며, 그만큼 더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이와 무관하지 않은 동시에 가장 눈에 띄는 서사상의 변화를 꼽자면 이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는 원작에 충실하느라 노상 빠트리지 않았던 이모부의 존재가 사라진 것, 그리고 그 자리를 ‘아이언맨’이 대체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기에 아버지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이언맨을, 좋았던 시절을 상실한 오늘의 미국에 대한 비유로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무기산업’을 통해 막강한 부와 기술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스파이더맨을 성장시키는 동시에 자신 또한 성장해가는 이 인간적인 아이언맨을 향해 샘솟는 연민이야말로, 쓰러져가는 제국이 문화상품의 형식을 빌려 상상적으로 작동시키려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핵심 동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 의구심에 확신을 더해주는 장치는 ‘캡틴 아메리카’가 청소년 교육 비디오에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아이언맨이 과거로부터 상속받은 물적 하부구조를 담당한다면, 미국의 건국이념을 상징하는 이 불멸의 캡틴 아메리카는 당장 잔고밖에는 기댈 구석이 없는 만신창이 미국의 자아 이상으로 작동함으로써 허물어져가는 상부구조를 일으켜 세우고 유지시킨다.
이처럼 견고하게 육화된 미국의 의식구조 속에 막 편입되어 그 가치를 마침내는 상속하게 될 철부지 스파이더맨은 어떠한가. ‘흙수저’ 결손가정 출신이지만 비상한 두뇌와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그는 사방으로 뻗치는 힘과 호기심과 정의감을 주체하지 못하며, 당분간은 골목대장 노릇에 만족하라는 아이언맨의 충고를 위반하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흙수저이지만 아이언맨의 사업 아이템을 몰래 착복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려온 ‘악의 세력’을 온전히 자기 힘으로 소탕하고 아이언맨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스파이더맨의 성장서사는 완결된다.
그것은 원맨쇼가 아니다
미국적 이념과 가치가 성장서사의 형태로 세습되는 것이 전부라면 스파이더맨의 ‘홈커밍’은 다른 무수한 미국산 영화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마블 시리즈를 방대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한 다원화된 세계관을 스파이더맨 또한 큰 틀에서 공유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여타의 시리즈물과 마블 시리즈가 변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당장 스파이더맨의 친구나 짝사랑의 대상을 유색인종으로 캐스팅한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나거니와, 앞으로 스파이더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많은 다국적 히어로들의 목록은 다문화주의라는 새로운 상부구조를 보편화하여 그 최종심급으로 기꺼이 군림하려는 미국의 야심찬 문화적 기획이라고 할 만하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영원한 ‘호갱’이자 미국에 대해 정치경제적으로도 유서 깊은 식민적 동반자인 우리가 저 다원화된 세계관의 옵션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단순히 저 세계관이 탄생하는 촬영지를 제공하거나 그 완제품에 돈을 지불하는 것을 넘어서, 문화융성이나 다문화사회와 같은 관제구호 아래 저 세계관의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는 중개상 또한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들의 옵션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더이상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혜자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그 이념은 더이상 ‘주입’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저 문화상품들이 어떤 이념의 변형태인지 너무나 도식적으로 빤히 들여다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풍부한 의미연관으로 영화 내에서 소비될 수 있음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를 다 알고도 속아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속물로서 이념에 철저히 ‘공모’한다. 그럴 때 그것은 결코 미국의 원맨쇼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스파이더맨을 ‘또’ 보고야 만 것은 그것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상상적 기획임을 다 알면서도 짐짓 속아주고 지지해주는 속물적 공모행위였던 셈이다. 진짜 다 알면서 본 건지 이 글을 쓰면서 그렇게 위장하는 건지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영속하기 위해 발악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문화상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하리라는 착각과 환상이야말로 그 노력의 순간에 소비되고 있으며,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함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메리카니즘의 상상적 구조물에 돈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소비 따위 애써 해보았자 변하는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 안의 속물성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향유하는 게 낫지 않나. 이 악무한의 세계 내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부정하고 기획할 수 있는 단독자라는 착각 따위 집어치우자. 마블 영화나 보면서 그 윤곽을 지레 짐작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저 ‘실체 없는 이념’의 꼭두각시가 우리의 진정한 실체임을 외면하지 말자. 이것이 스파이더맨을 ‘또’ 보아야 하는 이유라면 이유랄까?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사후적으로 도출해낸 이유보다 더 원초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 영화가 단지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은지 / 문학평론가
2017.7.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