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함께 거는, 그래서 함께 가는: 정홍수 산문집 『마음을 건다』
함께 거는, 그래서 함께 가는
―정홍수 산문집 『마음을 건다』
마음을 건다는 건 마음이 간다는 것과 다르다. 정홍수는 책 머리글에서 ‘마음을 건다는 것’의 간곡함을 말하며 그것이 “입장이나 주장”이라기보다 “태도나 자세”(7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마음을 건다는 건 일회적인 결단이 아니라 반복되는 수행의 문제라는 뜻 아닐까. 그가 마음을 걸 수 있어 행복했다는 ‘촛불집회’처럼. 산문집 『마음을 건다』는 그의 또다른 간곡한 마음 걺의 부단한 수행의 결과물이다.
1부 ‘사람들은 살아가고 버텨낸다’에는 어른이 되는 일의 어려움,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에 대한 생각부터, 지금은 문을 닫은 술집 ‘소설’ 이야기, 사회로의 입사 관문이었던 편집학교 생활, 선친의 비극적인 일화, 문우 김소진에 대한 기억 등 개인 정홍수가 살아오고 버텨낸 삶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다. 그것들과 나란히, 혹은 자연스레 섞여들면서, 동시대를 살아왔고 버텨냈던 “무명씨”들의 삶, 이를테면 70년대 구로공단의 여공들, 독일로 간 간호여성들, 문학 하는 사람들, 다음 세대에 대한 애틋한 감정 등이 함께 풀려나온다. 이런 삶의 일상사에 문학과 영화가 빠지는 일은 없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진흙」을 읽고 그가 “멈춤의 시간”(98면)을 얘기할 때 나는 그만 아득해진다. 그는 문학과 영화를 읽듯 세상을 읽는다. 아니, 어쩌면 그 역인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의 독법을 알아 문학과 영화를 따뜻하게 읽어내는지도. “간혹 강남 쪽을 지날 때면 그 가방이 생각난다”로 시작되는 산문이 있다. 대학 시절 그는 논현동에서 먹고 자며 과외를 가르치는 ‘입주과외’를 했는데 학교 끝나고 그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영영 가지 않는 과격한 선택을 한다. 그래서 “옷가지와 책 몇권이 들어 있던 보스턴백은 거기” 논현동 집에 남았다. “전화 한통 넣을 주변도 없었으니” 그 집에서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62면)이라고 그는 썼지만 나는 그가 그들로부터, 그 시간으로부터 영원히 실종되고 싶었으리라 짐작한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를 멍하니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아직도 그를 사로잡고 있는 실종의 욕망을 본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가고 버텨낼 것이다. 30년도 더 전에 두고 왔던, 아직도 강남을 지날 때면 낯선 논현동 집에서 폐기되었을 초라한 보스턴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2부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시절에’는 전반적으로 문학에 대한 단상들이 묶였는데, 이 산문들을 쓸 시기에 그를 사로잡은 ‘세월호’의 아픔이 기저에 짙게 깔려 있다. 세교연구소에서 개최한 ‘세월호 시대의 문학’ 심포지엄 일화에서, 한 시인이 심포지엄의 명명에 문제를 제기하며 누가 ‘세월호 시대의 바느질’을 이야기하느냐고 반문했다는 일화를 언급하며 그는 “무언가를 자처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문학의 자리”에 대한 회의를 짚어내고, 이토록 민감할 수밖에 없는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 감당해야 할 “자괴와 환멸”(186면)을 읽어낸다. 문학과 영화에 대한 깊은 고민과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는 2부에서 개인적으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정치신학자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에 대한 글이다. 그는 “뭔가가 쿵 하고 내 머리를 강타하는 느낌이었다”고 쓰고 있다. 건너갈 다리는 건너편에서 온다는, “진정한 구원은 바깥”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오고 현세적 질서와 초월적 질서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가 없다는, 그리하여 “썩어가는 세상에서 그 자신, 기꺼이 썩어가”며 “썩어가는 어떤 이웃들을 혼신으로 사랑하려고 한다”(『바울의 정치신학』 역자 조효원의 '해제' 참조)는 타우베스의 말들 앞에서 그는 “이 도저한 비관의 역설을 온전히 이해할 힘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두고두고 생각해보려고는 한다”고 썼다.(256~57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감, 그 충격은 불감당이지만, 내가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바를 그에게서 똑같이 확인하고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는 것과 그런 연대감이 나를 살짝 구원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3부 ‘세상의 시간, 세상의 풍경’은 밀양 송전탑, 위안부, 넬슨 만델라의 죽음에 부친 글 등 시사적인 문제와 영화에 대한 산문들로 채워졌다. 여기서 언급된 영화는 필리핀 독립 영화감독 키드랏 타히믹, 다르덴 형제, 차이 밍량 등 흥행과는 담 쌓은 감독들 작품인데, 무엇보다 정홍수가 경애해 마지않는 허우 샤오셴의 「자객 섭은낭」에 대한 독특하고 섬세한 접근을 보여주는 산문은 그대로 3부의 제목이 되었다.
서두에서 나는 성급하게도 마음을 거는 일과 마음이 가는 일은 다르다고 썼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은 둘이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정홍수는 「‘통증의 형식’과 ‘공감의 형식’」에서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을 언급하며, 화자가 정신질환으로 34년의 병원생활 끝에 가퇴원하여 양로원에서 살아가는 친구 에른스트 헤르베크를 방문한 일화를 소개한다. 먼 길의 소풍으로 피로에 지쳐 기진맥진한 헤르베크가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들려주는 “돌연한 과거로의 회귀, 인생에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작별과 상실의 이야기”(177면)는 얼굴을 돌리고 싶도록 아프다. 그런데 왠지 그 이야기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인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정홍수가 들려주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철길 이야기와 닮아 있다.
부산 범천동 철길에서 시작해 허우 샤오셴, 김지하, 오즈 야스지로오, 하이데거를 거쳐 나뽈리에서 뽐뻬이 사이의 간이역에 이르는 추억의 소환길, 그 마음이 가는 굴곡진 길을 따라가다보면 저 멀리 간곡한 마음 걺의 소실점이 보이고, ‘그 끝을 물고 이쪽으로 달려오는’(19면) 세상이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마음의 흐름”이 “세상으로부터 흘러온 것”(7면)이라 썼을 것이다. 마음 건 자리를 향해 묵묵히 가는 마음의 행로를 따르는 일, 그건 무척 외롭고 팍팍한 일이지만 그가 「자객 섭은낭」에서 보았듯 “세상의 시간과 함께 감당”(327면)하는 외로움이라 견딜 만한 것이리라. 그 길에는 “겹겹의 산이 있고, 길을 열어주는 동굴이 있고, 새가 날아드는 호수가 있고, 결국 연기 피어오르는 마을과 집이 있기 때문이다.”(328면) 기차가 터널을 지나는 “작은 기적의 순간”(6면), 마음을 거는 일과 마음이 가는 일이 찰나에 맞물린다. 이 찬란한 풍경을 “한동안 잊을 수 없”(21면)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우리다. 난 이 책에 마음이 간다.
권여선 / 소설가
2017.8.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