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균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동의 삶
문재인정부가 향후 5년을 ‘국민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이 규정에는 지난겨울 거리를 채운 촛불이 국민주권 회복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판단과 새 정부가 그 흐름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의지가 실행되는 과정이 수월하리라 단정할 수는 없다. 정부가 말하는 국민이라는 표현 속에 자신의 자리는 부재한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등장할 여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정부 정책에 대해 불만과 우려 섞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공동의 삶 속에 내재한 균열에 관해서라면 우리 시대의 예술작품 또한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김일란·이혁상 연출, 2016)은 2009년 용산참사 당시 망루에 있던 철거민 다섯명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알다시피 화염에 휩싸인 망루에서 누군가는 빠져나왔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동지들을 남겨두고 망루를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뿐 아니라 법정에서는 ‘공동정범’이라는 이름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 억울함을 겪는다. 그런데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서로를 위로할 듯한 인물들 사이에 의외로 분열이 발생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상황. 죄책감과 억울함과 분노를 가지고 각자 삶의 자리에 돌아오자, 자신들을 결속시켰던 뜻과 의지보다는 묻어두었던 의구심과 불만들이 더 날카롭게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으며, 인물들 사이의 균열을 쉽게 봉합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인물들이 내부에 일어나고 있는 균열의 표정을 실제로 마주하는 과정을 따라갈 뿐이며, 그럼으로써 균열이라는 결과를 외면하지 않도록 이끈다. 균열의 고통은 혹독했지만 그것을 직시하는 경험 속에서 이해와 공통의 감각이 조금씩 회복된다. 서로의 가장 약하고도 순한 곳을 내어 보이고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의 고통에 반응하고 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좋은 예술작품은 언제나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줄 뿐만 아니라 표현 속에 삶의 공간을 새롭게 열어 좀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행동의 실마리 같은 것을 준다. 「공동정범」은 우리를 규정하는 정체성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획득한 정체성 너머에 공동의 자리가 있다고도 암시한다. 민주주의는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근본조건으로 하지만 한편으로 공동의 삶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차이와 다양성만을 말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차이를 말하는 동시에 공동을 이야기하기란 일견 모순과 비약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각 밖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들은 결정적인 순간, 그 모순을 사건의 주체들이 형성되는 과정 속에 용해시킨다.
지난겨울 거리에 나선 촛불의 중심은 특정한 개인으로 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촛불의 현장을 경험하는 도중에 표출된 여러 차이나 갈등에서 보듯 참여자들 사이에 긴장도 있었다. 그런데 그 갈등과 긴장 속에서도 커다란 공동의 방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이게 나라냐”라는 부르짖음에는 나의 삶에 대한 질문만이 아니라 내 곁 사람들의 삶에 대한 물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공통의 감각이 정권을 바꾸었고, 집회 참여자들의 내면에도 무언가 새로운 기분과 생각들이 솟아나도록 했다. 염원이라고 해야 할까. 풀어 말하자면, 지속된 생각들과 강렬한 바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움직이는 중심을 이루었다.
촛불 이후, 대선을 거쳐 문재인정부의 초기 국면을 통과하는 지금에도 우리 내부의 균열을 피하지 않으면서 공동의 자리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가령 사드 배치, 증세,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중단 등을 둘러싼 내부의 갈등과 균열은 간단히 해결하기 힘들다. 이 사안들은 각각 남북관계 및 대미·대중 외교, 분배정의와 복지, 생태친화적 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더 큰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과제들과 맞물려 있다. 앞으로 촛불을 들며 뜻을 모았던 사람들이 서로의 뜻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는가를 묻고 점검하는 시간이 길게 펼쳐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아직까지는 새로운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에 환호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하지만 이 환호가 더이상 우리 사회에 불편함과 부족함이 없다는 착각을 만들어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재인정부는 높은 지지율을 정부에 대한 선호로 단정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공통적인 열망을 파악하고 실현하는 일에 소홀해지는 순간 촛불민주주의의 실현이 어려워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촛불시민들 역시 민주정부의 주권자로서 확연히 달라진 주체성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신고리원전 5·6호기의 장래를 놓고 공론화위원회와 시민대표참여단에 사실상의 결정권을 주기로 한 것은 촛불의 염원을 이어받는 뜻깊은 행보로 보인다. 우리 내부의 차이와 균열을 섣불리 봉합하지 않되 공통의 감각과 공동의 자리를 확보하는 시대적 과제에 시민들이 직접 주체로 나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시민참여형 민주주의의 실험은 다양한 차이를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공동의 삶을 마련하려는 시도로 다가온다.
앞으로 우리는 각자의 차이에 더욱 예민해지되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현실의 일들에 개방적이고 주체적인 자세로 임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의 차이를 빌미 삼아 그들과 짐짓 거리를 두는 태도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견 표출과 의견 충돌이야말로 공동선을 위한 사건의 씨앗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윤동주의 시구를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송종원 / 문학평론가
2017.8.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