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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의 당위, 그 이후: 김정아 소설집 『가시』

 

gwgwgwegw 100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성경 구절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타인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인간의 인간다움을 증명할 으뜸가는 윤리가 되어왔다. 너무 자명한 사실이라 의심하지는 않았으되, 어찌 보면 그것은 그만큼 수행하기 어렵기에 당초 인류가 반드시 지켜야 할 지상 과제로 지정된 것은 아니었을까. 2017년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인 『가시』(클 2017)를 읽다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이다.

 

 

불행한 이웃에 대해 소설을 쓴다는 것

 

작가 김정아는 이십여년 가까이 인권운동 영역에서 일해왔고, 현장에서 만났던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녀의 첫 소설집인 『가시』에 담았다. 총 8편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에는 파업투쟁에 실패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삶의 터전에서 내몰릴 위기에 처한 철거민, 알코올의존증이 있는 할머니와 살아가는 청소년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설은 “인류를 향한 긍휼”이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에서 보듯, 이 작가의 고민은 인권 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인 존재들을 보듬고 분배정의의 문제를 사회적 관심의 최전선으로 끌어내는 데 있다. 때문에 이 소설집은 악덕 사주에 의해 폐쇄된 직장과 철거 용역이 들이닥친 재개발 상가의 옥상을 함께 사수할, “다양한 나무와 풀이 다 같이 힘을 모아 벌레와 해충 그리고 나쁜 기운까지 막아내는 공동전선”(「곡우」 44면)을 요청하는 강직한 목소리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 소설이어야 했을까. 인권 억압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중에게 알리고 연대를 촉구하는 것이 작가가 말하려는 내용의 전부라면 말이다. 가령 도시개발과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1970년대는 수많은 수기와 ‘르뽀’를 낳은 시대이기도 했다. 현실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데다,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소재주의적 부담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기나 르뽀의 강점에 비추어 보면 소설의 약점이 드러난다. 소재를 취사선택하고 이야기로 가공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소설은, 현장성의 측면에서든 윤리적인 측면에서든 상대적으로 무력함을 안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소설집 『가시』의 미덕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설 양식 특유의 무력함을 이해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강직한 목소리가 머뭇거리는 순간,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는 순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두 장면은 어떨까.

 

표제작 「가시」에서 노조지부장 출신인 주인공 ‘나’는, 한때 여공이자 노조원이었지만 지금은 민폐덩어리 전과자가 된 여성 윤미희를 외면한다. 가난 때문에 소년원을 전전하다 공장에 취직해서 겨우 마음을 잡았던 그녀를 농락한 것은 함께 노조활동을 하던 학생운동권 출신 운동가였다. 이후 거듭된 불행 속에서 그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두고 오로지 세상에 대한 울분과 적의만으로 뭉쳐진 인물이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가시’는 윤미희가 세상으로부터 입은 상처를 가리키기도 하고, 동시에 그녀가 세상을 향해 분출하는 적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윤미희를 향한 인간적인 연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었던 불행의 촉감이기도 하겠고, 그녀를 멀리한 결과 ‘나’의 내면에 돋아난 양심의 가책이기도 하겠다.

 

한편 「몽골 낙타」의 주인공은 갓 서울로 전학 온 여중생이다. 미혼모였던 소녀의 어머니는 가정을 이루어 떠났고, 소녀는 알코올의존증이 되어가는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서로 마음을 나누던 단 한명의 친구는 얼마 전 가출했다. 의지할 곳이라곤 하나 없이 소녀는 온전히 홀로 남겨진 셈이다. 우리 시대 약자의 비극을 고발한다는 취지로 인터뷰를 요청한 다큐멘터리 피디를 향해, 소녀는 가출한 친구의 음성을 빌려 항의한다. “걔는 감독님 같은 사람들이 제일 싫대요. 부자들한텐 돈을 얻고 가난한 사람들한텐 이야기를 얻는다구요.”(「몽골 낙타」 113면)

 

이 소설집의 깊이는 실천적 리얼리즘의 목적의식이라든가 윤리의식 등이 실로 무색해지는 순간, ‘마땅히 그러해야만 하는’ 당위가 무력해지는 순간에 생겨난다. 다시 말해, 이웃 사랑과 연대를 향한 신념이 위기를 맞는 순간,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위가 현실 속에서 장벽에 부딪치는 순간이 서사의 입체성을 만들어낸다. 당위와 현실 간에 생겨난 균열은, 정작 불행한 이웃을 외면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혹은 다큐 피디의 카메라를 매개로 타인의 불행을 들여다보는 소설적 허구화의 장치들 속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이로써 선명해지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타인의 불행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자아의 무력함이다.

 

가시덩굴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운동

 

굳이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하는 순간들은 왜 중요한가. 그것이 ‘인권, 연대, 사랑’ 같은 말들을 그저 기계적으로 발화하지 않도록 막아주기 때문이다. 가시 박힌 이웃을 대하는 버거움, 가시덩굴로 함께 떠밀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곧 인간 간의 연대와 사랑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겠기 때문이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사랑은 나약하다. 이에 소설집 『가시』를 관통하는 정서의 한 축은 책임감이다. 고통의 임계점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자기 다짐인 것이다. 또다른 정서의 축은 죄책감이다. 느슨해지는 사랑의 감정이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되고 있는 까닭이다. 자기모순을 짊어지고 마치 시계추처럼 책임감과 죄책감 사이를 오가는 왕복운동, 이는 세계의 불행을 드러낼 도구가 되기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순간부터 시작된 갈등이라 하겠다. 결국 가시덩굴 속에서 사랑을 찾는 자의 갈등이 인권운동의 현장을 소설세계로 옮아오도록 만든 것이다. 소설은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들추고 자기모순의 왕복운동을 가속시킨다. 내적 갈등은 심화되겠지만 적어도 사랑은 매순간 갱신되리라. 이로써 소설쓰기는 구원 아닌 구원이 되는 셈이다.

 

정주아 / 문학평론가,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7.8.3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