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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망각된 인권, 형제복지원: 도보행진을 떠나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위하여

김재형

김재형

올해는 87년 6월항쟁 3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이와 달리 그동안 잊혔지만 꼭 주목해야 할,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된 지 30주년이 된 역사적 비극이 있는데,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부산에 위치해 3000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한 국내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소였다. 이 안에서 500명이 넘는 수용자가 사망하였고, 또 대다수의 수용자들이 다양한 인권침해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6월항쟁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피해 받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형제복지원에서 고통 받았던 사람들은 30년 동안 국가와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되어왔다. 그 과정에서 피해생존자들은 형제복지원의 경험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수면장애 그리고 신체장애 등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왔다. 이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이 사건을 알리고, 철저한 진상규명, 국가권력의 사과, 적절한 배상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재공론화하기 위하여 9월 6일 오늘 기자회견 후 국토대장정에 나섰다. 이제 이들의 외침에 주목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촛불 이후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민주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잊어선 안 될 너무나 큰 비극

 

1987년 처음으로 세상에 실상이 드러난 형제복지원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 직후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형제복지원을 중심으로 전국 복지시설 실태에 관하여 조사를 하고 진상조사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조사에는 당시 부산지역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폭행치사, 강제노역, 임금착취, 공안사범 강제수용, 신경안정제 강제투약, 요양비 이중 착복, 사체 판매 등이 형제복지원 내부에서 상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충격적인 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보고서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5공 비리의 대표적인 10대 유형 중 하나로 규정했다. 또한 1988년 민주화추진협의회의 활동을 정리한 ‘민추사’의 간행사에는 형제복지원을 위시한 일련의 복지원 사건들을 박종철 고문치사, 권인숙 성고문사건과 더불어 전두환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언급했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대표적인 사회복지정책의 실패이자 인권침해로 인식되었던 이 사건은 그러나 국민적 관심이 6월항쟁으로 쏠리고, 그 법적 처리 역시 유야무야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곧 잊혀졌다.

 

1975년 박정희정권은 내무부훈령 410호를 통해서 ‘부랑인’이라고 낙인찍힌 도시 하층민들을 대대적으로 단속해 부랑인 시설에 수용했다. 당시는 한국전쟁 시기 설립되었던 고아원 등이 고아 수가 감소하면서 사업영역이 축소되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을 추진하던 박정희정권이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결국 새로운 보호수용 대상을 필요로 하던 사회복지시설의 이해와 치안유지라는 정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부랑인’ 수용시설이 설립되었다. 한편 부랑인 수용시설은 1980년대에 더욱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정화운동을 추진함과 동시에 서울올림픽이라는 국제행사를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1981년 ‘총리지휘서신’을 통해 “구걸행위자 보호대책”을 추진하여, 부랑인수용시설의 증설을 명하고 도시빈민들에 대한 더욱 큰 규모의 단속 및 수용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 명령의 성공에 필수적인 경찰이나 하위공무원들을 독려하기 위하여 부랑인 단속 실적당 근무평점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일반적 의미의 ‘홈리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단속 및 납치되어 형제복지원에 입소됐다. 신민당 조사와 최근의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잠들었던 회사원, 가족이나 친척을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탔던 어린아이들, 귀가하던 청소년, 장애인 등 무고한 사람들이 부랑인으로 둔갑하여 적법한 절차 없이 공권력에 의해 무작위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길게는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용되었다. 이렇게 수용된 사람들은 나이불문하고 형제복지원 수용건물의 증설을 위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이 모델은 전두환정권에 의해 모범적인 사례로 다른 복지원에 소개되었다.

 

각종 사회복지 관련법에 의거해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설립 및 운영되었던 형제복지원이었지만, 국가와 지방정부는 형제복지원의 관리감독을 방기했다. 그 결과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은 유사군대와 같은 조직서열체계를 구축하고 일상적인 폭력을 통해 급격히 늘어나는 수용자들을 통제했다. 수용자들은 군대와 같이 ‘소대’에 소속되었고, ‘소대장’ ‘중대장‘들의 사적권력하에서 통제됐다. 유아들은 체계적으로 입양시장을 통해 국외로 “적절한” 가격에 팔려갔고, 소년들은 소대장 및 상급자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 일상적인 성폭력에 시달렸다.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장애인들은 더욱 극심한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정신병동에서 구속된 여성 장애인들에게는 참혹한 성폭력이 가해졌다. 구타에 의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장애를 입은 사람은 더욱 많았다. 폭력은 그 흔적을 살아남은 사람들의 신체에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의 폭력과 구타, 학대를 이기지 못해 정신질환을 얻은 사람들도 너무 많다. 이것은 모두 88올림픽을 준비하며 고도성장을 이루던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일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형제복지원에서 사망한 이는 최소 551명이었고, 사체는 형제복지원 뒤에 암매장되거나 인근 병원에 임상실험용으로 팔려갔다. 한 피해생존자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부산의 무연고자 묘지에 가서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시절,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망각된 채 죽어간 이들의 원혼이 떠올라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민주화 이후 여러 억울한 죽음과 사연들이 과거청산을 통해 일정 정도 사회적으로 다시 기억되고 해원되고 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에서의 숱한 죽음은 사회적으로 철저히 망각됐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시금석

 

지난 박근혜정부에서 행정안전부의 한 공무원은 왜 이 사건을 노무현정권 당시 과거청산위원회에서 다루지 않았느냐며 이미 시효가 끝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노무현정권 당시 이 문제가 공론화되지 못한 이유는 이 사건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고아, 장애인, 빈민 등 부랑인으로 국가에 호명된 이들은 한국사회의 가장 하층에 고립되었다. 어떠한 교육과 사회화 과정 없이 장기간 시설에 수용되어 있다가 뱉어지듯이 사회로 나온 이들에게 자신들의 피해가 감히 국가에 배상을 요구해야 할 문제라는 각성조차 없었다. 또한 주홍글씨처럼 붙은 “부랑”이라는 낙인은 반드시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과거였다. 이들은 과거가 알려지면 사회에서 다시 낙인찍혀 형제복지원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숨죽여 지내왔다. 한 피해생존자는 지금도 형제복지원이 있던 지역의 말투만 들어도 누군가 잡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공황장애가 온다고 한다.

 

이렇게 철저히 망각됐던 이들, “부랑인”으로 낙인찍혀 고통받던 이들이 이제 당당히 세상에 30년 전에 받았어야 할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한국사회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이 확립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주례동의 형제복지원 터 앞에서 청와대까지 거의 500km의 여정을 떠나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하기를 기원하며, 한걸음 한걸음에 담겨 있는 이들의 요구를 우리 사회가 더이상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김재형 / 서울대 사회학과 형제복지원 연구팀

2017.9.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