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진짜 문제’가 된 북한의 핵과 한국의 선택
9월 2일 진행된 6차 핵실험으로 북한은 핵탄두를 장착하고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위한 거의 모든 실험 단계를 마쳤다. 북핵은 동북아, 나아가 글로벌 질서에 변화를 촉발하는 변수가 되었다. 미국도 이제 한반도에서의 적당한 긴장과 대결적 상황을 즐기기 어려워졌으며 어떤 방식으로든지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도 자신의 몸값을 최대한으로 올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현상 타파를 위해 움직이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는 지금까지의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제재”라는 사이클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국면, 즉 대규모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극단적 대립국면으로의 진입인가, 아니면 대화와 타협으로의 극적인 전환인가라는 분기점을 향해 가고 있다. 북핵은 ‘진짜 문제’(real problem)가 된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사태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일단 부정적이다. 여전히 진짜 문제로서 북핵을 직시하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북핵을 활용하려는 관성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데이비스(William Davies)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많은 발화의 성격에 대해 “그 말들은 현실을 재현하려는 어떠한 인식적이거나 기호적인 열망도 결하고 있으며, 그저 현실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 그것들이 없었다면 현실의 본질에 관한 실증적이거나 경험적인 질문들로 채워질 수 있는 담론공간을 차지하고 현상(現狀)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규정했다.(월리엄 데이비스 「새로운 신자유주의」,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316면) 이 말은 우리 사회의 북핵 관련 논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북핵과 관련한 논의가 많지만 대부분 북핵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위의 인용문처럼 문제의 해결보다는 현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힘이 담론공간을 지배해왔다. 무엇보다 분단체제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적의 각종 허구적 주장이 불변의 진리처럼 반복해서 주장되고 있다. 말로는 분단체제의 극복을 지향한다면서도 막상 논의를 펼칠 때는 자기검열이 강하게 작동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만들 수 있겠는가?
제재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사태를 악화시켜
먼저 더 강한 압박과 제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 주장은 지난 10년간 압박과 제재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더 빠르게 발전시켰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 진작 파산선고를 받았어야 했다. 이제 이 논리는 중국의 비협조에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원유공급 중단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화를 퍼트리고 있으며 우리 정부도 이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북중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만들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이 신화에 집착하는 사이에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더 강화될 뿐이다. 설사 중국이 이러한 요구를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문제해결과 거리가 멀 것이다. 문제의 최종적 해결 이전에 한반도 상황은 준전시상태로 진입하는 사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중국은 북한의 붕괴 이전에 출현할 이 사태를 더 우려하고 있다.
국내의 제재 만능론은 문제해결을 위한 논리라기보다는 수구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만약 이들이 더 강한 제재와 압박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러한 믿음이 실재하는지도 의심스럽지만)을 충실하게 실현하고자 한다면(이들에게는 이러한 능력도 없다. 전시작전권 반환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어떻게 군사적 대립을 초래할 수 있는 결정을 하고 그 상황을 관리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에서 심각한 군사적 대립과 충돌이 불가피하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이다. 이러한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무책임한 주장을 반복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진짜 문제가 출현한 것이다. 적당히 상황을 즐기고 넘어가겠다는 생각으로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따라서 북핵 문제에 대해 제재와 압박을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법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문재인정부가 이러한 접근법을 찾아갈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재인정부도 북핵 문제에 있어 관성적 사고, 혹은 희망적 사고에 입각한 접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북정책이 수구세력에 하이재킹될 우려
무엇보다 지난 10년 동안 북핵 문제의 성격이 크게 변했음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북한은 단순히 대화의 재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목표로 핵과 미사일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는 북한의 행동논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 없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논리로 북한을 대화로 끌어들이려 했다. 여기에는 북한이 호응하거나 적어도 기다려줄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선택에는 개인적 호불호가 아니라 분단체제라는 구조적 변수가 더 크게 작용한다.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채 막연히 대화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북한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지금은 기대와 다른 북한의 도발에 대해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단 국내 여론을 관리해가는 접근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새 정부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이러한 대응이 북한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전술핵무기의 도입, 북한 전쟁지도부 참수부대 창설 등 나중에 주워담기 어려운 발상과 주장들이 이어지는 모습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드와 관련해서도 이제 지난 정부가 전가한 부담이라는 정상을 참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새 정부도 사드로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거짓 논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과 대립을 한층 더 고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주장과 결정들은 온전히 문재인정부의 책임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은 수구세력에 의해 하이재킹되고 결과의 실패에 대한 책임만 문재인정부가 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사회개혁이 순조롭게 추진될 리도 만무하다.
물론 미국이라는 변수가 새 정부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미국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일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미국을 무조건 추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이미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 미국은 동북아 및 동아시아에서 군사네트워크 강화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미국은 상당 기간 동안 북한의 핵능력이 자신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북한의 핵능력이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북한체제가 붕괴될 수 있다는 데 판돈을 걸어왔다. 그런데 이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거나 머지않아 도달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미국도 정책 전환이 필요한 상황인데,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새로운 접근법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의지와 비전을 갖고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이 운전석에 앉기 위한 전제이다.
자기파멸적 게임을 ‘윈윈’ 게임으로
이제라도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 상황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실현 가능성을 고려한 해결방안을 찾아가야 한다.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 강화 과정을 중단하고, 이를 통해 마련된 초보적 신뢰를 다양한 교류와 협력 사업을 통해 확대시키며 문제해결에 우호적 환경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한반도에서 자기파멸적 게임이 아니라 윈윈게임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크고 담대한 구상이 필요하다. 비핵화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대화 제안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현실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북한이 현재의 폭주를 멈출 수 있는 제안을 갖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및 대폭 축소, 개성공단 재개를 뛰어넘는 수준의 경제협력 등이 이 제안에 포함될 수 있는 내용이다. 비핵화는 신뢰구축의 결과이지 그 전제가 아니다. 이를 두고 북한에 너무 큰 댓가를 지불하고 북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만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의 무대를 바꾸어갈 수 있다면, 즉 군사적 경쟁이 아니라 사회와 경제 활력의 경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이는 굴복이나 실패가 아니라 큰 성공이다.
한국이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의 무대를 만들기보다는 “핵에는 더 강경한 제제로”라는 식의 바람직하지 않고 불리한 경쟁과 대결에 몰두하는 것은 오히려 패배와 실패를 자초한다. 새로운, 그리고 윈윈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게임을 시작할 때 한국의 역량이 빛을 발할 수 있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 수 있다. 그것이 촛불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남주 /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2017.9.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