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선거제도 개헌’이면 어떨까?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후에도 개헌 추진 의사를 분명히 밝혀왔다. 국회 개헌특위가 개헌안을 합의해내면, 국회 본회의 의결을 거쳐, 그걸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청와대와 집권 민주당이 선호하는 새 권력구조는 대통령 4년 중임제로 알려져 있으나, 만약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정당 득표율과 의석 점유율 간의 비례성이 높은 새로운 제도로) 개혁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국회가 다양한 민의를 제대로 대표하는 기구로 거듭날 수만 있다면,) 의회중심제인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전환에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대통령의 뜻이 이렇게 선명하니 이번엔 드디어 30년 묵은 저 낡은 ‘87년체제’가 개편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 문제 많던 제왕적 대통령제가 폐기되고, 승자독식 민주주의가 합의제 민주주의로 바뀌며, 어느날엔가는 드디어 시민 모두가 사회적 자유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그 좋은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지금으로 봐서, 87년체제의 극복 혹은 전환 여부는 상당 부분 자유한국당에 달려 있는 듯하다.
현재 국회에는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두 특별위원회가 가동되고 있다. 하나는 개헌특위이고, 다른 하나는 정개특위이다. 후자는 주로 선거제도 개혁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특위 공히 최종 개혁안 성안을 내년 2월까지 마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이 협조하지 않으면 두 특위는 모두 아무런 개혁안도 만들어낼 수 없다.
우선 개헌특위 상황을 보자. 개헌특위가 만약 2월까지 합의안을 도출해낸다면 그 안은 5월 24일까지 국회 의결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래야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6월 13일에 국민투표에 회부될 수 있다. 그런데 국회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요한다. 총 300석 중 현재 107석을 갖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는 개헌안은 작성할 필요조차 없다는 의미이다. 자유한국당은 (대통령이 여전히 국가원수이긴 하나, 국회 선출 총리가 행정부 수반이 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주창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경험한 우리 국민이 자당 출신 대통령을 다시 뽑아줄 가능성은 (적어도 상당 기간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까닭일 게다. 어쨌든 자유한국당이 청와대와 민주당의 바람대로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찬성해주지 않는 한 권력구조 개편 합의안은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개헌특위에서 권력구조 개편안이 합의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민주당이 대통령 4년 중임제를 포기하고 야당 모두와 함께 분권형 대통령제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을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의 전제로 내세웠다. 말하자면, 자유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찬성해줘야 분권형 권력구조로의 개편안 합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번엔 정개특위 상황을 보자. 자유한국당은 비례성이 높아지는 선거제도 개혁에 반대하고 있다. 자당의 의석 축소와 좌파 및 중도 정당의 부상 등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반면, 다당제 정착을 원하는 국민의당과 정의당, 그리고 바른정당 자강파는 선거제도 개혁을 개헌보다 중시하는 입장이다. 민주당도 당론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이다. 그러나 다른 당 모두가 아무리 노력한다한들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면 어떠한 개혁안에도 이를 수 없다. 정개특위는 전원합의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자유한국당이 결정 변수이다.
어떻게 하면 자유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찬성하고, 그래서 청와대와 민주당이 야당과 더불어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전환을 추진하며, 그래서 ‘87년체제’가 개편되도록 할 수 있을까?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것과 대통령이 바라는 걸 맞교환하여 그 둘이 다 이루어지도록 해보는 건 어떨까? 다시 말해서, 청와대와 민주당이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 제안을 받고, 대신 그 당으로부터 선거제도 개혁 약속을 받아내는 건 어떨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비례성 높은 새 선거제도를 들여온다고 해서 반드시 자당의 의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믿을만한 건전 보수정당으로 환골탈태하여 새롭게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 제도하에서도 중도보수, 그리고 잘만하면 중도정당까지도 연립에 끌어들여 집권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등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자유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혁을 받고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을 성사시킬 가능성은 상당하다.
필자를 포함한 몇몇 학자는 개헌론이 한껏 뜨거워졌던 2016년 중순께부터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성 보장 원칙을 천명하는 조항을 아예 헌법에 넣자고 주장해왔다. 사실 새로운 주장은 전혀 아니다.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체코, 폴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미 이런 조항을 헌법에 담고 있다. 국내에서도 ‘나라 살리는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라는 시민단체가 작년 12월에 이같은 조항이 들어가 있는 헌법개정안을 내놓은 바 있다. 현재 국회 개헌특위의 자문위원회도 동일한 내용의 권고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헌법 41조 3항을 다음과 같이 개정하자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비례대표제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하되, 각 정당의 의석점유율은 정당투표에서 드러난 정당별 득표율에 비례하도록 하여야 한다.”
개헌특위에서 자유한국당이 이같은 선거제도 관련 조항 개정에 동의해주고, 그래서 민주당이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에 찬성한다면, 내년 2월에 나올 국회 헌법개정안은 권력구조 개편과 선거제도 개혁을 동시에 담고 있는 이른바 ‘패키지 개혁안’이 된다. 양대 정당 간 맞교환 방식에 의해 성안된 그 개혁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승자독식체제에서 합의제체제로 발전해가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담은 그 개혁안을 국민이 거부할 리는 없다. ‘권력구조 개헌’ ‘기본권 개헌’ ‘지방분권 개헌’ 못지않게 ‘선거제도 개헌’이 중요한 이유이다.
최태욱 /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2017.10.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