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미국 외교의 멜트다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첫 아시아 순방(11월 5~14일)이 끝났다.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대안적 사실’의 대가인 트럼프 자신의 평가로는 당연히 무기 판매와 에너지 수출 등을 중심으로 335조원 규모의 거래가 체결된 미국우선주의의 ‘엄청난 성공’이다. 그의 막말과 외교적 결례를 걱정한 이들의 입장에서도 큰 사고가 없었으니 성공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그러나 이미 익숙해진 ‘트럼프 우선주의’의 기준에서 벗어나서 보면, 성공적이라 평가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이번 순방에서 중국이나 필리핀 등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다자적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했다. 베트남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에서는 중국이 역내 자유무역의 주창자가 되었고, 일본은 트럼프가 취임 직후 탈퇴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를 계속 추진하였다. 인권과 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며 동맹과 세계자본주의를 관리하는 패권의 전통에서 보면, 이번 순방은 미국의 연성권력, 가치와 제도 건설의 측면에서 패권의 외교적 몰락의 시작이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무엇을 했나
백악관이 웹페이지에 밝힌 이번 순방의 목표는 대북압박의 국제 공조, 인도-태평양정책, 공정무역의 세가지였고, 이들에 대한 설명 혹은 선전은 한국과 베트남에서의 두개 주요 연설에서 제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들 연설에서 새로운 아시아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은 없었다. 11월 8일 한국 국회 연설에서 트럼프는 한국의 성공과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서 인민을 굶기고 탄압하는 북한체제를 문명의 적으로까지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인도적 지원이나 북한 민주화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한 대북 제재와 압박의 정당화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쓸데없는 모욕이었다. 북한에는 핵과 미사일 군비 확충으로 절대 평화를 얻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그는 미국이 압도적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하는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를 추구한다고 천명했다. 안보 딜레마를 부정하는 극한의 이중 기준이었다. 항모전단이 3개나 동원된 무력시위가 이어지면서 북한은 11월 13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이 우리 공화국의 숨통을 죄기 위해 1년 연중 쉼 없이 벌이고 있는 핵전쟁 연습과 협박은 우리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고 끝까지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트럼프의 한국 국회 연설은 평화의 길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인도-태평양정책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인도-태평양정책과 공정무역은 11월 10일 베트남 다낭 연설에서 다뤄졌다. 전자에 대한 소개는 소략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은 상이한 문화를 지닌 주권국가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곳으로 규정되었다. 미국과 이 지역의 경제적, 군사적 관계의 기원이 소개되고 지역 국가들의 발전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고는 WTO(세계무역기구) 체제에서 미국이 불공정무역에 시달렸다는 비판 혹은 비난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다짐이었다. 어떻게 해서 인도-태평양의 독립적인 주권국가들이 미국과 공영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 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특히 베트남에 오기 전에 동맹국 일본과 한국은 물론 중국에도 미국의 일자리 창출과 무역적자 개선을 요구한 ‘협상의 달인’ 트럼프의 행태는 일대일로 등을 통해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중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불확실한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은 북핵과 인도-태평양, 공정무역 정책의 핵심 대상이었다. 시 진핑은 10월의 19차 공산당 전국대회에서 집권2기의 권력을 공고화했다. 그는 ‘황제의전’과 283조원 규모의 경협으로 트럼프를 극진히 접대하면서도,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평화적으로 달성한다는 기존의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트럼프도 시 진핑의 정치적 성공을 찬양하고, 기존의 불공정무역은 중국이 아니라 전임 미국정부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며 제도적 개선에 대한 전면적 압박에 나서지 않았다. 트럼프 순방의 마지막 기착지 필리핀에서 열린 아세안과 동아시아 정상회담에 참석한 인도 모디 총리가 트럼프와 일본의 아베, 호주 턴불 수상과 연쇄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또 트럼프와 아베, 턴불의 삼자 정상회담을 통해서 인도-태평양정책의 핵심 4개국 연합(the Quad)이 출범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 모두 남중국해 문제의 직접 당사자는 아니다. 중국이 이번 아세안 정상회담을 계기로 아세안 국가들과 ‘남중국해 관련 행동규범’ 제정을 위한 협상에 합의하면서 트럼프 정부는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 압박에도 실패했다. 인도-파키스탄의 숙적 구도는 핵 비확산체계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교란 요인이다. 인도-태평양정책이 구체화된다고 해도 그 효과는 불확실하다.
트럼프는 2008년 금융위기가 증폭시킨 미국패권의 정치경제적 멜트다운(meltdown)의 산물이다. 그에 의해서 미국패권의 외교적 멜트다운이 시작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신형 국제관계를 도모하는 중국의 외교적 부상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미국과의 안보-경제-가치 전략동맹이 해체되고 있다.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혜정 /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2017.11.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