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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혜정 『냉전 이후 미국 패권』

냉전 이후 미국 패권 100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어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충격을 안겨준 지 1년이 지났다.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이자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을 당선시킨 미국은 “내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라고 놀라움을 표현했다. 미국은 한국에도 중요한 숙제이다. 한국의 운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치적·문화적 정체성이 결정될 정도이다. 산적한 한국의 외교적 과제를 풀어가는 데 한미관계를 설계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한국의 수많은 정치학자들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왔지만 막상 미국의 외교정책을 연구하는 데 정면승부를 건 경우는 많지 않다. 미국의 외교를 미국의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정확히 판단하고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국제정치학자인 이혜정 교수의 『냉전 이후 미국 패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전쟁의 변주』(한울 2017)는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미국의 정책을 미국의 시각에서 다룬 학술연구서이다(10면). 저자는 중견 국제정치학자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예리하고 심도있게 연구해온 전문가이다. 미국이 건국할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역사와 국내정치, 대외관계를 추적하여 미국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는 연구를 꾸준히 발표해오고 있다. 본서는 냉전이 종식된 1990년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을 분석한 책이다. 41대 아버지 부시 대통령부터 현 트럼프 대통령에 이르는 기간이다. 저자는 탈냉전기 다섯명의 미국 대통령 치하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패권이라는 개념과 이론의 틀에서 추적한다. 단순한 강대국이 아닌, 세계의 질서와 규범을 제시하고 운영하는 패권국의 개념은 국제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저자는 패권을 운용하는 미국의 지위와 정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통찰력 있게 설명한다.

 

미국의 패권전략, 변화 그리고 위기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미국의 패권적 외교정책의 기반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전쟁으로 대변되는 지정학의 상호관계이다. 냉전을 수행하던 미국이 공산권을 봉쇄하는 정책을 펴면서 세계 구석구석에 개입해왔지만 적극적 개입과 자제의 스펙트럼 위에서 대전략을 둘러싼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베트남전에서 패색이 짙어가던 1972년 대선에서 이미 “돌아오라 미국이여”라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다(17면). 공산권이 무너진 이후 미국은 봉쇄정책을 대신할 대전략을 놓고 논쟁을 거듭한다. 저자는 개입, 패권과 고립, 철수의 양극단으로 이원화된 미국의 고민을 상세하게 설명한다(33면). 1990년대 중반부터 자제-역외균형의 대안이 부상하기도 하고 단극안정론과 자유주의 패권론의 결합으로서 미국 패권 예외주의가 제시되기도 한다(36면).

 

탈냉전기 미국의 전략은 단연 패권전략으로 귀결된다. 이미 1990년대 초 부시 대통령은 패권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클린턴 대통령은 개입과 확산의 안보전략을 추진했으며, 21세기의 패권을 위한 지구화의 조정전략 속에 탈근대의 도전들, 예를 들면 국제금융위기나 과학기술 등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비해왔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패권전략은 정점에 달해 소위 신보수주의 세력은 21세기를 미국만이 주권을 지닌 시대, 세계의 상호의존에서 벗어난 미국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시대로 만들고자 하였다(102면).

 

그러나 저자는 21세기 초의 10년이 미국에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고 단언한다(155면). 테러의 온상인 중동에서 민주주의 재건의 꿈은 실패했고 민주주의 확산을 뒷받침한 변환외교 역시 단막극에 불과했으며, 경제는 대침체의 위기를 맞이하고 국내 정치는 양분화되는 가운데 중산층의 몰락은 심화된다. 이미 레이건 대통령 시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기획이 국내·국제 정치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패권전략의 기반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담대한 희망을 제시한 오바마 대통령 역시 대침체의 경제위기 속에서 심화한 정치적 양극화, 중산층의 몰락, 씨퀘스터(Sequester, 미국정부의 자동예산삭감 제도) 등으로 인해 대외정책 장애에 부딪혔고 결국 정치, 경제, 외교의 삼중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트럼프 시대’, 한국의 길은?

 

저자는 탈냉전기 미국 패권의 흐름에 대한 흥미롭고 심도있는 분석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미국을 진단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자체를 둘러싼 해석의 싸움이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지구적 맥락에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는 설명과, 미국 역사에서 유구한, 내지(heartland)의 시골 기층민중이 연안의 도시 엘리트에게 지닌 반발이 트럼프의 포퓰리즘으로 재현되었다는 설명이 적절히 결합되어야 한다고 본다(232면). 더 중요한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모순, 더 넓게는 미국 패권의 구조적 문제가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일종의 정치변동의 임계점을 넘어 기성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을 가져왔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234면). 이와 관련해 저자는 백인우선주의, 트럼프 우선주의, 미국우선주의라는 현상이 이러한 임계점에 이르게 한 중요한 추동력이었다고 설명한다.

 

트럼프 정부의 대외전략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현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본심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핵심을 찌른다. 즉, 트럼프가 재건하려는 위대한 미국은 기존의 패권국가 미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경제적 이익과 세계자본주의의 이익을 일정하게 조화, 관리하려는 패권의 의지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257면).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위대한 미국은 미국인이 안전하고 잘살고 자부심을 느끼는 그런 보통의 강대국일 뿐이다(258면).

 

한국의 고민은 여기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저자는 트럼프의 당선으로 한국의 보수가 주장해온, 안보는 물론 경제와 가치의 차원에서도 미국과 일체화되겠다는 전략동맹의 기조는 이미 무너졌다고 본다(261면). 미래의 미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지 더 깊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서문에서 논의되고 있듯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은 미국의 세계·패권 전략의 하위체계라는 것이 공리이므로 미국의 변화는 한국의 운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10면). 저자가 바라는 바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의 저자가 되기 위해 이 책의 일독을 권하게 된다.

 

전재성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17.11.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