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불평하라

이향규

이향규

착한 아이를 격려하는 사회

 

군소리 말고, 잔말 말고, 묵묵히(默默. 이 단어에는 침묵이 두개나 있다!)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은 늘 칭찬받았다. 나는 불평하지 않는 것이 미덕임을 어린 나이에 일찍이 알았다. 그게 착한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늘 “참 착하구나. 착하면 됐다”고 말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언제나 ‘착한 어린이’가 되라고 가르쳤다.

 

이 세상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분명히 나눠지고, 착한 사람이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큰 상을 받게 되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무래도 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착한 사람을 호구로 아는 사람들을 보면, 천성이 나쁜 사람보다는, 상대방이 아무 말 안 하니 ’그래도 되는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 더 많았다. 또한 착하고 어리숙한(‘착하다’와 ‘어리숙하다’는 흔히 같이 다니는 말이다) 사람이 얌전히 참고 있으면 하늘의 복이나 사회정의가 어련히 알아서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나보다.

 

잘 참는 한국 사람들

 

이 일이 흑인이나 무슬림 아이에게 일어났다면 학교가 이렇게까지 무시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영국 친구들의 생각이었다. 차별에 민감하게 항의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거다. 결국 또 ‘한국 사람들은 너무 참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 소년과 그 엄마 이야기다.

 

소년은 열한살이다. 그는 학교생활 내내 영국 아이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1학년 때 한 아이가 그에게 귓속말했다. ‘영어 하지 마. 네가 말하는 거 아무도 못 알아들어.’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학년 때 ‘냄새 나는 검은 머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지금도 엄마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아보라고 한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3학년 때는 한 아이가 밀쳐서 다리를 다쳤다. 4학년 때도, 5학년 때도, 6학년 때도 그는 끊임없이 다쳐서 왔다. 말로 자기를 충분히 변호하기 어려웠던 그는 자주 울었고, 그를 괴롭힌 아이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말을 꾸며댔다. 얼마 전에 소년이 크게 상처받는 일이 또 생겼고, 그의 좌절과 분노는 한계를 넘었다.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고, ‘노’(No)라고 소리치며 잠꼬대를 했고, 밤마다 깨서 몸을 떨었다. 그는 지금 학교에 가지 않는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나는 그녀가 그간의 자초지종을 보고서로 만드는 일을 도왔다.

 

엄마는 지난 몇 년 동안 아들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학교와 상의했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교사에게 알렸고, 어떤 때는 교장과 공식면담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엄마가 너무 착했어요.’ 그녀는 지금까지 괴롭히는 아이들을 처벌해달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상황을 이렇게 방치한 학교에 책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요구하자니 아들과 같은 나이인 어린 소년들의 앞길이 걱정되었고, 매일 등하교 지도를 하는 교장선생님의 노고가 고마웠다. 그래서 아들이 겪는 어려움만 이야기했다. 그 어려움을 호소하면 학교가 ‘알아서’ 조치해줄 것을 기대한 면도 있다. 그래서 후속조치를 채근하지도 않았다. 대책 없이 학교를 믿었고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이들이 싸우는 방식

 

지금 그녀를 도와주는 영국 친구들의 접근은 조금 다르다. 먼저 보건소 주치의의 편지를 받아 학교에 제출했다. 의사는 괴롭힘(bullying)으로 인해 아이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다음으로 학교에 다음과 같은 자료를 요청했다. 학교의 괴롭힘 방지 정책(Anti-bullying policy) 문서, 그동안 학교에서 발생한 아들의 사고 기록, 아들을 괴롭힌 다른 아이들의 사고 기록(학교에서 일어난 모든 사고는 그 경위와 교사의 조치를 의무적으로 기록해두어야 한단다) 등. 덧붙여서 아들이 학교를 못 가기 때문에 박탈당한 교육권을 학교가 어떻게 보장해줄지 계획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교장의 제안에 대해서 학교가 이 자료를 다 제출하면 엄마가 검토한 후에 미팅에 참석하겠다고 했고, 미팅에는 교장 이외에 이사회에서도 참석하기를 원한다고 답신했다. 의사소통은 모두 이메일로 해서 문서로 남겼다. 학교는 긴장했다. 요청한 자료 복사본을 모두 보내줬고, 소년이 가정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학습자료를 제공했다. 그전까지 행정문서같이 차가웠던 교장의 이메일이 지금은 소년의 건강과 안위를 묻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지금 나는 불평하고 항의하면 상대가 어떻게 바뀌는지 경험하고 있다. 항의한다고 해서 화내면서 소리 높여 싸우는 게 절대 아니다. 이 싸움은 뜨겁지 않다. 오히려 차갑다. 예의를 갖추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들이 마땅히 따랐어야 하는 절차를 냉정히 묻고, 그 증빙자료를 요구한다. 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분명히 한다. 우린 어린이가 안전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학교가 보내준 괴롭힘 방지 정책 (Anti-bulling policy)이다. 이걸 보니 교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다. 우리에게도 이런 게 필요하다.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기준 말이다.

학교가 보내준 괴롭힘 방지 정책 (Anti-bulling policy)이다. 이걸 보니 교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다. 우리에게도 이런 게 필요하다.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기준 말이다.

 


‘적폐청산’, 거대담론에서 나의 일상으로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에서도 이렇게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싸움은 많은 경우에 처절하고 원통하고 뜨겁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구경꾼들이 나서서 이제 그만하라거나, 뭔가 이유가 있으니 당했겠지라며 희생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싸움의 과정이 너무 길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웬만한 결단이 없이는 끝까지 가기도 어렵다. 우리도 냉정하고 교양있게 조목조목 불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정당한 문제제기를 떼쓰기나 한풀이라고 모욕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갖춰야 할 것이 있다. 사회 곳곳에 구성원이 합의해서 만든 규정과 절차가 잘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디 가서 호소할 수 있는’ 그런 기준 말이다. 그리고 ‘불평’을 당연한 의사소통 방식으로 보는 문화도 필요하다.

 

뉴스로 보는 한국사회는 몇 달 째 ‘적폐청산’ 중이다.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는 천장 한 구석에 햇빛을 쬐이는 것 같다. 그걸 보면서 궁금해졌다. 부패한 정치권과 그에 결탁한 권력기구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과연 우리가 체감하는 일상을 얼마나 바꾸게 될까? 거대하게 먼 곳에서 바뀌는 그 변화가 내 일터에서, 가정에서,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마을에서도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소년과 그 어머니를 보면서 배운다. 당당하게 불평해도 된다. 아니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는 불평해야 한다. 지체 없이 단호하게. 침착하고 냉정하게.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래야 나도 성장하고 내가 사는 사회도 좋아진다. 불평해야 바뀐다. 2018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자기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보면 어떨까.

 

이향규 /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영국 거주

2017.1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