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년칼럼] 촛불혁명과 촛불정부
‘촛불’은 혁명 맞다. 하지만 생각 없이 혁명을 말하며 기분 내는 것은 촛불혁명의 성공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자랑하는 촛불항쟁의 평화로운 성격은 고전적 혁명론에 어긋나는 특성이며, 대통령 파면과 정권교체가 기존 헌정질서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촛불’이 87년체제의 수호요 재작동이지 혁명일 수 없다는 주장도 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바 있다.
2016~17년의 촛불항쟁이 이미 혁명의 시작이라는 인식은 단지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다. 1년 전의 신년칼럼에서 지적했듯이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한층 본질적인 혁명”(졸고 「새해에도 가만있지 맙시다」, 창비주간논평 2016.12.28)이 일어났고 바로 그런 혁명이 필요한 분단국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문제인 것이다. 물론 학문적으로도 혁명사와 혁명론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사안인지 모른다.
촛불정부와 촛불대통령
이렇게 이해한 촛불혁명은 아직 진행중인 혁명이고 ‘미완’으로 끝날 가능성도 남아 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촛불로 탄생한 정부에 기대를 걸기도 하고 가슴 졸이기도 한다. 다행히 대통령 스스로 ‘촛불정부’를 자임하며 촛불혁명의 완수를 다짐하고 있다.
그런데 촛불항쟁이 평화적이었기 때문에 종전의 제도적 틀 안에서 치러진 대선국면은 엉뚱한 역전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었다. 역전이 실제로 벌어진 사례로는 1968년 프랑스의 5월혁명이 선거에서 드골 대통령 세력의 압승으로 끝난 역사가 두드러지거니와, 한국에서 그런 반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야말로 촛불시민의 위력이다(졸고 「’촛불’이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낼까」, 창비주간논평 2017.9.13). 하지만 투철한 혁명적 집단이 집권하기는 애당초 힘들도록 설계된 경로였다.
더구나 민주헌법의 수호를 위해 평화적으로 탄생한 정권이기에 혁명과업 또한 기존의 법질서와 헌법절차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 촛불혁명의 거의 모든 과제를 부정하는 세력이 국회의 3분의1 넘는 의석을 차지한 채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데도 2020년의 총선 이전에 응징할 수단이 마땅치 않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대통령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국가의 불행이지만 정부를 위해 다행스러운 것은 구정권의 너무나 많은 인사들이 실정법을 너무 많이 위반했기 때문에 행정부의 권한으로 촛불시민이 요구한 적폐세력 청산을 수행할 여지가 무척 넓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법치의 실행만으로도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혁명적 과업이 크게 전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성문헌법을 촛불정신에 맞게 개정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선거법개정 등 필요한 입법현안도 쌓여 있다. 박근혜가 제거된 지금 그를 몰아낸 ‘탄핵연대’의 복원은 쉽지 않겠지만 과반수 지지라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연합정치가 절실하다. 또한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개헌안의 국회통과가 난망인 상황에서 그 경우에 어떻게 하리라는 ‘플랜 B’도 지혜롭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난관이 많지만 촛불혁명에 대한 인식과 촛불정부로서의 자긍심이 뚜렷하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참으로 많다. 중요한 것은 문재인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잇는 ‘제3기 민주정부’라기보다 ‘촛불시대의 제1기정부’라는 발상의 전환이다. 예컨대 대통령이 지금도 선거기간이나 취임초기를 방불케 하는 소통과 위무의 행보를 계속하는 것을 두고 ‘쇼’를 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는 오히려 ‘촛불대통령’ 본연의 임무라 봐야 한다. 나는 대통령이 국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촛불정신을 북돋우고 촛불민심을 살피며 촛불혁명 완수를 다짐하는 발언을 계속했으면 한다. 어느 대통령이든 국민여론을 선도(先導)하는 역할을 떠안게 마련이지만, 이번 대통령의 경우는 촛불혁명의 전도사로 적극 나서는 일이 기본 직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전도사 행각’을 벌이는 것이 대통령의 정신건강에도 좋고 민주주의의 장기적 비전에도 걸맞다. 청와대에 들어앉아 있는 대통령은 ‘갑’ 중의 ‘갑’이지만 선거운동 하듯 다니다 보면 후보시절 ‘을’의 초심을 간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아가, 대통령과 국민이 갑을관계를 떠나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세상이 촛불의 꿈이 아니었던가.
그럴수록 일상적인 국정운영을 맡길 사람들을 잘 골라야 한다. 국무총리나 대법원장 또는 국무위원뿐 아니라 여타 고위직과 정부 산하기관장의 인선에서도 정파적 친소관계나 이념적 잣대에 매이지 않고 공심과 업무능력을 갖춘 인물을 찾아야 한다. 또한 시민이 공직자들을 감시하고 독려할 장치들도 더 창의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돌파구로서의 남북관계와 시민참여
현재 남북관계는 정국의 돌파구는커녕 촛불정부의 발목을 잡는 덫에 가깝다. 핵문제로 인한 한반도 긴장이 국내 수구세력의 기를 한껏 살려주었고, 미국으로 하여금 일방적이고 과도한 청구서를 들이댈 빌미를 주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야말로 국내의 적폐청산 작업처럼 대통령이 여소야대 국회에 휘둘리지 않고 주도할 수 있는 대통령 고유의 업무영역이다. 더구나 지난 두 정권이 워낙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잘해도 국민의 갈채를 받을 분야이다.
문제는 남북관계가 워낙 망가진 상태라서 ‘조금만 잘’ 하려 해서는 조금 잘하기도 힘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재·압박과 대화의 병행’이라는, 박근혜도 말로는 그랬고 트럼프도 되뇌는 구호를 답습해서는 북이 죽기살기로 추진하는 핵무장 정책을 바꿀 수가 없다. 북의 정권을 좋은 정권이라고 두둔할 마음은 없지만, 자신의 생존과 체제보전을 위해 정권이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예측하고도 남을 일인데, 한때 햇볕정책 내지 포용정책을 통해 핵무기 없는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가 9년 동안 그 정책을 온통 뒤집어놓고 이제 와서 비핵화를 위한 대화에 응하지 않으면 ‘더 강한 제재와 압박’을 하겠다고 하면 저들에게는 백기투항 요구로 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북이라는 까다로운 상대가 있고 미국이라는 외부요인도 있어 정부의 운신폭이 무척이나 좁다. 더구나 국민들도 그동안 북에 대한 반감과 심지어 혐오의 정서를 키워왔다. 때문에 남북관계처럼 어려운 문제는 후순위로 돌리고 우선 손쉬운 국내문제부터 해결해보려는 유혹이 생길 법도 하다. 그러나 이는 남북관계 개선이 없이는 국내개혁의 동력도 근원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분단체제의 속성을 간과하는 길이다. 여기서 돌파를 못하면 촛불혁명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날 우려가 크다. 반면에 어차피 여소야대 국회 때문에 한계가 지어진 개혁작업들도 한반도 긴장이라는 근원적 장애를 제거해놓으면 조만간에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촛불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외교에서도 대통령 스스로 언급한 촛불이라는 중요한 자산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반도문제에서 우리의 주도력을 높여야 한다. 필요할 경우 상대방 정상을 향해, “당신 말을 들어주려 해도 나는 촛불대통령이라 그러다간 훅 가버릴 수도 있다”고 ‘개기는’ 방법도 써봄직하다. 촛불시민들이 이 과정에 적극 나서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가 광장에서 ‘평화로운 삶’을 요구했던 의미를 되새기면서, 단순한 교류협력정책의 복원을 넘어 한반도의 궁극적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는 남북간의 공동 위기관리 장치 등 ‘포용정책 2.0 버전’(졸저 『2013년체제 만들기』 제2부 참조)이라 부름직한 방안들을 제기할 때이다.
‘포용정책 2.0’의 구성요인으로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을 말하면 흔히들 당국이 아닌 시민이 통일작업을 좌지우지해야 한다는 허황된 주장이거나 남북협력사업 중 민간의 몫을 늘리는 정도의 지엽적 사안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민참여’의 가장 큰 몫은 대화와 교류를 거부하는 정권을 시민의 힘으로 갈아치우는 일이다. 이 기본적인 책무를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 훌륭하게 이행하였다. 남은 과제는 정권을 잃었을 뿐 여전히 사회의 각종 고지에 포진하고 있는 세력을 촛불시민과 촛불정부가 힘을 모아 제압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정부와 대통령의 분발을 촉구하면서 시민들 스스로도 평화로운 한반도와 핵 없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혜를 선보일 때가 되었다. 피 흘리고 땀 흘리면서, 때로는 추위에 떨며 여기까지 온 우리 아닌가.
* 이 글은 한겨레신문 2017년 12월 28일자에 동시 게재됩니다―편집자.
백낙청 /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2017.12.2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