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적폐청산에서 체제혁신으로
새해가 밝았다. 그런데 새해가 정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까. 국내정세는 지난해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6월 지방선거까지는 ‘적폐청산’의 기조가 이어질 것이고 이것이 정국의 기본구도가 될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면 그 이후는 또 어떻게 될까. 개혁의 동력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적폐청산 너머의 길
지난주 창비주간논평에서 백낙청 교수는 촛불혁명, 촛불정부, 촛불시민의 과제를 논하면서 현 정국의 핵심쟁점이 되고 있는 적폐청산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백낙청 「촛불혁명과 촛불정부」, 창비주간논평 2017.12.28). “구정권의 너무나 많은 인사들이 실정법을 너무 많이 위반했기 때문에 행정부의 권한으로 촛불시민이 요구한 적폐세력 청산을 수행할 여지가 무척 넓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적폐청산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중요한 말은 오히려 그다음에 나온다. “정상적인 법치의 실행만으로도” 촛불의 “혁명적 과업이 크게 전진하게 되어 있”는데, “성문헌법을 촛불정신에 맞게 개정”하고 “선거법 개정 등 필요한 입법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연합정치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적폐청산이 과거 체제에 대응하는 문제라면, 법치, 개헌, 정치개혁 등은 새로운 체제를 구성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애당초 ‘적폐’라는 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민주정부 시기를 부정하기 위해 동원한 말이다. 빨갱이, 종북 등과 같은 용어처럼 대상을 자의적으로 선정하고 권력을 이용하여 혐오와 배제를 조직화한다. 이런 말은 돌고 돌아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 박근혜정부의 폭주가 극에 달하자 국민들이 박근혜정부에 적폐라는 말을 다시 되돌려주었다.
‘적폐청산’은 양날을 지닌 비수이다. 정치투쟁이 격화되면 칼이 누구를 찌를지 모른다. 물론 특정 세력이 특정 시기를 못 박아서 관련 수사를 기획하고 매듭짓는 것은 적절치 않은 방식이다. 권력남용과 부정부패의 뿌리를 자의적 판단으로 용납하는 것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적폐청산을 주도하는 세력이 거론되고, 이에 곁들여 10년, 20년 계속집권 프로그램 이야기가 흘러 다니는 것도 좋은 조짐이 아니다. 당장은 적폐청산 프레임이 여권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보겠지만, 그 효과는 점차 감소할 것이다.
‘체제혁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속적인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체제혁신’이라는 비전을 갖는 것이 좋다고 본다. 체제혁신 프레임은 우리가 제거·극복해야 할 체제(또는 체제의 구성요소), 우리가 창설·지향해야 할 체제(또는 체제의 구성요소), 그리고 체제이행의 방법과 과정 등을 제시해준다. 지금 당장 벌어지는 사건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데 그치지 않고, 해야 할 일의 본말과 순서를 분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체제는 ‘세계체제-분단체제-87년체제’이다. ‘87년체제’는 1987년 헌법개정과 함께 형성된 부분적 민주화 체제, 그리고 변형된 국가주의적 발전모델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87년체제는 국내적·일국적 차원에서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여러 차원의 체제가 동심원적 구조를 이루면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87년체제는 당시의 ‘세계체제-분단체제’에 조응하여 형성된 것이고, 각 체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세계체제-분단체제는 87년체제에 규정력을 지니지만, 87년체제의 변동이 분단체제·세계체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체제혁신은 세계체제-분단체제-87년체제에 대응하는 총체적인 사회변혁의 전망을 견지하면서도, 각 체제의 여러 구성요소들의 개별적 경로를 혼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개념이다. 혁신은 한편에서는 단절·비약이지만, 또다른 한편에서는 누적·연속의 과정을 포함한다. 체제혁신은 세계체제-분단체제-87년체제의 핵심요소들을 혁신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서로 연결되지 않은 혁신은 고립되고 소멸된다.
박근혜정부는 분단체제를 강화하면서 87년체제의 민주적 성격을 후퇴시키려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붕괴했다. 촛불혁명 과정에서 분단체제와 87년체제를 넘어서는 정치적·사회적 동력이 만들어질 기회가 열리기도 했다. 촛불연합을 체제화하면 세계체제-분단체제의 압력을 이완시킬 혁신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은 박근혜정부(나아가 이명박정부) 핵심세력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인적청산 작업만으로는 공안권력의 구조개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현재 공안권력은 분단체제-87년체제의 기반 위에서 형성되어온 것이다. 체제적 관점에서 검찰·경찰·국정원 등의 공안권력을 분립·분권하는 비전을 꾸준히 실천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공안권력 개혁은 정치적·경제적 힘을 다원화·지방화하는 방향과 함께해야 한다.
촛불연합과 분권화로 진정한 혁신을
현재의 적폐청산 작업은 분단체제-87년체제의 혁신이라는 비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 않다. 분단체제가 강화되면 87년체제에 내장된 정치적 양극화 경향 역시 강화된다. 과거 정권 심판에만 초점을 맞추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체제혁신의 동력과 기반이 잠식될 수 있다. 체제혁신은 민주세력의 광범위한 연결·결합 속에서 이루어진다. 분권형 개헌과 선거법 개정이 촛불의 연합정치를 제도적으로 공고화하는 초석이 될 수 있다. 포용적·분권적 성장으로 발전경로를 변경하는 것도 정치적 환경이 마련되어야 가능하다. 촛불연합의 체제화는 체제혁신의 핵심 고리라 할 수 있다.
촛불연합의 동력을 업고 가더라도 세계체제-분단체제의 규정력은 만만치 않다. 국내적으로는 87년체제가 형성되었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1953년 이후의 세계체제-분단체제가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화는 북한의 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소산이기도 하다.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가 북핵위기와 함께 강화되고 있지만, 이 역시 세계체제-분단체제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촛불연합이 약화될수록 세계체제-분단체제를 혁신할 힘은 위축된다. 연합정치를 체제화하여 국내정치의 적대적 진영구조를 완화하면,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힘이 약해진다. 현재는 미국의 대북한·대중국 전략을 축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운영되고 있다. 국내체제가 세계체제·분단체제와 맺는 핵심적 연결고리는 한미 간의 군사동맹 체제이다. 기존의 한미동맹에, 평화를 지향하는 한중일 관계와 남북관계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동아시아 체제를 안정화하는 현실적 방안이다. 한미동맹, 한중일 관계, 남북관계를 세개의 솥발처럼 균형화하려면, 국내정치의 협치구조가 필요하다. 분권화된 정치력이 더욱 강력한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체제혁신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방안이다. 여기에는 집권적·자의적인 권력행사 방식을 분권적·규칙적으로 전환하는 것, 여러 층위의 조직·제도에서 네트워크형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체제혁신은 국내적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고, 세계체제-분단체제의 혁신과 함께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2018.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