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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악의 연대기: 영화 「1987」

이진혁

이진혁

노동자 400여명을 희망퇴직시키기로 한 회사의 결정에 맞서 309일 동안 타워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에 대한 1심 판결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목적의 정당성만으로 수단의 불법성이 용인될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2012년 부산지법에서 김진숙의 유죄를 선고하며 낭독된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수단의 불법성이 용인되던 시기에 대한 질문을 소환한다. ‘그 시기’는 언제였는가, 지나갔는가, 정말 지나가버렸다면 김진숙은 왜 타워크레인에 올랐는가.

 

어떤 기억은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마저 굴절시킨다. 1987년의 기억이 특히 그런 것 같다. 끊임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철폐’를 외치던 사람들, 몇날 며칠 광장에 열린 해방구, 무기를 손에 들지 않고도 독재자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승리의 기억은 뒤이어 전개된 씁쓸한 역사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체육관선거를 통해 전두환에게 권력을 승계받을 예정이었던 노태우는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됐고, 그후 펼쳐진 민주화 과정에서 경제 부문은 소외됐다. 6월항쟁이 열어젖힌 이른바 ‘87년체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거대한 전환을 이뤄냈음에도 그 시작부터 균열을 내포한 것이었다.

 

「1987」이 담아낸 시대와 인간

 

많은 면에서 좋았던 영화 「1987」(장준환 감독)의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것도 ‘그 시기’가 이제는 말끔하게 청산된 야만적인 과거로만 다뤄지기 때문이다.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6월항쟁이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집단의 힘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실로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에 따른 초호화 캐스팅은 영화의 볼거리를 더한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점도가 크게 낮아지지 않는 것은 유일하게 시종일관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 캐릭터의 공이 크다. 「1987」은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스릴러이기도 하고, 애끊는 가족애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하고, 대학을 중심으로 한 로맨스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거대한 악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악의 연대기다.

 

「1987」에 등장하는 악은 그 나름의 정의감으로 작동한다. 북한을 버리고 월남한 이들이 더 극렬한 반공세력이 되어 사회정의를 부르짖은 간단치 않은 역사가 있다. 박처장도 마찬가지다. 인민군에게 가족이 몰살당한 후 월남한 그는 개인의 영달보다 ‘빨갱이 때려잡기’가 중요하다. “빨갱이 잡는 걸 방해하면 다 빨갱이로 간주하겠다”며 상관을 때리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캐리커처가 특히 압권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간단치 않은 캐릭터를 사필귀정식 악의 몰락으로 단순하게 정리해버린다. 전두환에게 버림받은 박처장이 구속돼 교도소장과 만나는 순간은 승리의 기쁨과 포개지고, 갈등은 과거로 박제된다. 박처장의 몰락이 통쾌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비뚤어진 정의감으로 폭력을 일삼은 제2, 제3의 박처장이 87년 이후에도 수없이 존재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박처장은 박처원이라는 실존인물을 구현한 것이더라도 역사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박처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사의 끝은 그저 한 인물의 종말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다소 공허하다.

 

박처장과 직접 힘을 겨루는 최검사(하정우)도 실존 인물인 최환에 허구를 가미한 캐릭터인데, 그 역시 윤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정의의 편에 선다는 점에서 단순하지 않다. 그가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의 화장 동의서에 도장을 찍지 않은 이유는 대공수사처에 끌려다니다가 검찰만 “여태껏 똥물을 뒤집어썼다”는 조직논리 때문이며, 경찰에게 무시당했다는 자존심 때문이다. 여러모로 박처장의 거울상이다. 이 거울상은 악의 상대성을 시각화한다. 실제로 최검사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전에는 체제 수호자로서 대공수사처에 협력해왔음이 여러 장면에서 암시되기도 한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선한 의지만이 아니다. 개인의 양심이 정의로운 결과를 낳는 것은 우연적이다. 이는 제도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한 새 세상

 

결국 제도, 즉 민주주의의 문제다. 악인의 처벌에 관한 인상적인 일화가 있다. 2011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한 극우주의자가 민간인 76명을 살해한 끔찍한 테러사건이 벌어졌다. 테러리스트의 처벌에 사람들이 집중할 때 당시 오슬로 시장이었던 파비안 스탕은 이런 연설을 한다. “우리는 죄인을 벌할 것입니다. 더 관대해지고, 더 관용을 베풀고, 더 민주적이 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이 말에 비춰보면, 우리 사회는 박처장들을 제대로 벌하고 있는 걸까. 사회변혁의 기운이 높은 순간 운 좋게 악인들을 처벌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없이 많은 ‘법꾸라지’들이 제도를 악용한 역사를 우리는 지금도 보고 있다. 마침 촛불혁명이 진행 중이다. 악인 한 사람을 처벌하는 적폐청산도 필요하다. 그러나 87년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제도를 상상하는 것, 노동자가 타워크레인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6월항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최초의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1987」은 높이 살 가치가 있다. 특히나 이 영화가 기획되던 때가 블랙리스트의 서슬이 시퍼렇던 박근혜정권하였다는 걸 고려하면 출연을 자처했던 배우들을 포함해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박수받아 마땅하다. 이 영화를 추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면서도 한두 아쉬운 소리를 덧붙인 것은,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 그려낸 새 시대의 희망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진혁 / 출판편집자

2018.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