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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 말하기: 지금, 이곳에서, 다시 한번

김보명

김보명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은 법조계, 공직사회, 의료계는 물론 학계와 문화예술계, 그리고 학교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성적 피해를 고발하는 여성들의 말하기로 이어지고 있다. “나 또한 (피해자야)! (Me Too)”라고 외치는 수많은 목소리들은 성폭력 피해의 발화를 통해 서로에게 연결되고 서로의 용기가 되는 페미니스트 실천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들은 말한다. 당신이 나의 성적 자율권과 노동의 권리와 교육의 기회를 침해하였으며, 내가 겪은 이 피해는 나의 잘못이 아닌 당신과 당신을 보호하는 사회의 잘못이라고.

 

경험을 말하는 행위는 피해회복과 정의실현의 시작이다. 그리고 시작은 반이다. 한번도 잊은 적 없지만 한번도 제대로 말해보지도 못한 성적 피해의 기억들은, 발화의 행위를 통과하면서 사회적 사건이 되고 문화적 실재가 되고 역사적 기록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말하기의 실천은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왔다. 가깝게는 지난 2016년의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 운동과, 몰래 카메라와 리벤지 포르노의 추방을 외치는 디지털 페미니스트 액티비즘이 있었고, 조금 더 돌아보자면 2003년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시작한 ‘생존자 말하기 대회’와 진보사회 내의 성폭력을 고발한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의 선언이 있었으며, 더 멀리는 1994년의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낸 수많은 사건들과 이를 ‘사건’으로 만들어낸 피해자들의 저항이 있었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파장은 한편으로는 달라진 것 없는 한국사회의 성문화를 확인하는 씁쓸함의 순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쌓여온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와 최근 재부상한 디지털 페미니스트 실천의 힘을 확인하는 희망의 순간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시간은 균질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진다. 피해자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침묵하고 잊으려 애쓰지만 결국 또다시 말하고 살아간다.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며, 그 피해의 유형은 다양한 언어적, 신체적, 환경적 형태로 일어난다. 일상에서 무심하게 던져지는 성적 발언과 이미지들, 디지털공간과 대중문화를 잠식하는 여성혐오 콘텐츠들, 학교와 직장과 가정에서 ‘아는 사람들’이 행하는 성적 접근과 침해의 행위들은 모두 시민으로서의 여성이 이 사회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를 침해한다. 그리고 검사와 정치인과 교수와 승무원과 영화배우라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나도!”라고 외칠 때, 우리는 깨닫는다. 젠더정치학은 노동의 문제이며, 정치의 문제이며, 예술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임을.

 

성폭력 피해의 경험은 종종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정의를 표상하는 법조계, 안전과 건강을 제공하는 의료서비스, 편안함과 즐거움을 약속하는 항공사,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듯 보이는 문화예술계, 그리고 때로는 보살핌과 사랑의 장소인 가족과 친족들이 사실은 차별과 권력으로 짜인 세계라는 놀라운 깨달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성폭력이, 그리고 젠더정치학이 결코 여성과 남성 간의 사적인 문제로 축소될 수 없음을, 혹은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가 지극히 사회적인 것임을 배운다.

 

성폭력은 단지 나의 몸을 허락 없이 만지거나 나를 동료나 학생이나 노동자가 아닌 ‘계집’으로 취급하는 행동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성폭력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사회문화적 힘들로 직조되는 경험이고 사건이다. 또한 그렇기에 성폭력 피해의 발화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몸의 경계를 넘어 그 몸들이 살아내는 사회와 역사를 드러낸다. ‘법’을 지키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 법의 경계를 함부로 넘어서고 법의 영역에 대한 자신의 친밀한 근접성을 스스로의 잘못을 감추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검찰의 구조와 문화, 여성 배우나 작가를 생산자나 노동자가 아닌 원재료 정도로 취급하는 예술계의 노동과 예술에 대한 태도, 여학생을 학문적 주체나 미래의 시민으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교육자들의 소양과 자질은 모두 우리 시대의 성폭력 피해들을 만들어내고 구성하는 요건들이다.

 

최근의 ‘미투 운동’은 검사, 정치인, 영화배우, 의료인 등 ‘괜찮은’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대중매체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유례없는 반향을 낳고 있다. 이 놀랍도록 용감한 선언들에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보내는 한편, 이러한 말하기의 시간과 장소들이 이주여성들과 장애인여성들과 성노동자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김보명 / 여성학 연구자

2018.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