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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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돌아온 윤이상, 떠나간 진은숙

설준규

설준규

지난 25일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유해가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부인 이수자 여사에게 전달되었다. 유골함은 공설봉안당에 임시로 안치되었다가 내달 30일 통영국제음악당 뒷마당, (고인이 평소 바라던 대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작년 7월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베를린 인근 윤이상 묘를 참배하고 통영 동백 한그루를 심을 때 이미 예상된 일이긴 하지만, 1969년 간첩누명을 쓴 채 고국에서 ‘추방’된 지 49년, 1995년 숨진 지 23년 만의 귀향은 반갑고도 반갑다. 개인적으로는 통영을 찾을 때마다 마음 한쪽을 짓눌러오던 송구스러움을 덜었으니 다음 통영행은 한결 흔쾌하겠다.

 

윤이상의 예술적 후예

 

윤이상 선생의 귀환 소식을 읽노라니 또 한 사람의 한국 출신 세계적 작곡가 진은숙을 떠올리게 된다. 진은숙은 최상급의 수상경력과 작품위촉 내역에서 드러나듯, 세계음악계에서 높은 예술적 위상을 인정받는 작곡가다. 그는 그로마이어 작곡상(2004), 쇤베르크상(2005) 그리고 비후리 시벨리우스 음악상(2017) 등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상을 섭렵했다. 특히 1953년 제정된 이래 20명의 수상자만을 선정한 시벨리우스 음악상은 시벨리우스를 비롯, 힌데미트,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브리튼, 메시앙 등, 서양 현대음악의 기라성 같은 대작곡가들이 수상자 목록에 올라 있다. 아울러 그는 베를린필하모니, LA필하모니, 런던심포니 등 세계 유수의 악단으로부터 작품을 위촉받을 정도로 높은 성가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진은숙은 서울음대 명예교수인 작곡가 강석희의 애제자인데, 강교수는 윤이상을 깊고 오래 사사했다. 1968년 강교수는 동백림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윤이상이 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1년 가까이 매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70년 독일로 유학해 그의 문하에서 장기간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윤이상 선생님 덕에 강석희 선생님이 존재할 수 있었고, 독일에서 막 돌아온 강석희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문화+서울』 2017년 12월호) 진은숙 자신의 말이다. 두 작곡가 사이의 음악적 영향관계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진은숙은 윤이상의 예술적 후예라 할 만하다.

 

진은숙은 2006년, 당시 서울시향 음악감독 정명훈의 권유로 시향 상임작곡가로 취임해 “도전적이고 환상적이면서 자극적이고 때로는 청중을 당혹스럽게 하는 다채로운 현대음악을 선보이는”(시향의 안내문) ‘아르스 노바’(Ars Nova, 새로운 예술) 시리즈를 기획, 시행하며 작년까지 12년간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2015년 말, 정명훈이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와 갈등에 휘말리면서 음악감독직을 사임하자, 진은숙은 공석이 된 공연기획자문역까지 맡아 고군분투한다.

 

이즈음 서울시의회는 감사를 통해 상임작곡가와 관련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서울시의 ‘(재)서울시립교향악단 기관운영 감사결과’(2017년 7월)와 시의회의 ‘행정사무감사 결과보고서’(2017년 12월), 그리고 감사결과에는 적시되지 않았으나 언론에 보도된 감사 당시 시의원의 발언내용 등을 종합해보면, 진은숙의 활동과 관련해 다음 몇가지 사항이 집중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첫째, 상임작곡가와 공연기획자문역을 겸함으로써 이중보수가 발생한 점. 둘째, “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의 경우, 상임작곡가는 3년 이내의 계약을 맺는 것이 일반적인데 서울시향은 지난 10년 동안 오로지 한 사람과 계약을 맺어 자칫 독주체제”가 우려되는 점.(UpKorea 보도, 자유한국당 이혜경 시의원 발언) 셋째, ‘아르스 노바’ 시리즈가 낯선 현대음악만을 고집한 탓에 객석점유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해 예산지출이 과다한 점.

 

“나를 지키기 위해”

 

‘행정사무감사 결과보고서’가 나오고 불과 한달 만인 새해 벽두에 시향단원들에게 보내는 전자메일을 통해 사임의 뜻을 밝힌 진은숙은, 사임의 배경에 관한 추측이 분분하던 1월 24일, 소설가 홍현진과 진행한 장문의 인터뷰를 『허프포스트코리아』에 게재한다(「허프인터뷰: 작곡가 진은숙이 서울시향을 떠난 이유를 직접 해명하다」, 2018.1.24). 이 인터뷰는 “향후 200년간 한국의 음악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문헌”(음악평론가 김원철)이라는 논평에 걸맞은, 우리 음악계에 관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자료이지만, 여기서는 사임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진은숙의 해명 또는 입장만 추려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용부호를 달지 않지만 많은 부분이 직접인용이다. (아래에서 ‘나’는 당연히 진은숙 자신이다.)

 

첫째, 이중보수 문제. 공연기획자문역은 시향에 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어서 수락했다. 연봉은 약 6만7천 유로였고 1년 반 가까이 일했는데, 처음 3~4개월은 무보수 자원봉사였다. 이 역할은 오케스트라의 모든 음악적 이슈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지기에 업무 부담이 막중하다. 둘째 상임작곡가 임기 문제. 임기가 1년인 악단이 있는가 하면 핀란드처럼 한 작곡가가 20년 이상 유임하는 경우도 있다. 제도 운영방식은 전적으로 각 오케스트라의 몫이다. 셋째 ‘아르스 노바’의 수익성 문제. 현대음악 연주회는 당연히 클래식음악 연주회보다 관객수가 적다. 오히려 ‘아르스 노바’의 경우 외국의 현대음악 연주회보다 관객수가 눈에 띄게 많아서, 초청된 외국인 지휘자나 협연자가 부러워할 정도다. 그리고 ‘아르스 노바’는 단순히 연주회만으로 끝나는 사업이 아니라, 청중에게 현대음악을 접할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는 한편 신진작곡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실연할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그들이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악단의 입장에서는 난이도 높은 현대음악으로 레퍼토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연주기량도 높이게 된다. 마스터클래스 같은 교육사업을 포함한 포괄적 사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큰 예산이 아니다. 여러 기업에서 후원금도 받았다.

 

진은숙은 시향을 떠나는 절박한 심경의 일단을 이렇게 솔직히 내비치기도 했다. “누구나 생존하기 위해 자존감이 필요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만일 내가 생존해나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존감을 갖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 스스로가 나를 보호해야만 한다. 이것이 시향을 떠나기로 한 많은 이유 중의 하나다. 내가 살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결정했다.”

 

감사 과정에서 불거진 지적사항의 부당성에 대한 진은숙의 입장이 사임 이유의 전부는 아닐지 모르지만, 정황으로 보아 적어도 그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은 적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서울시 행정당국이 되었건 시의회가 되었건, 그의 해명과 반론에 대해 반박이든 수긍이든 사과든 무슨 반응을 보이는 것이 한 세계적 예술가가 12년간 국내음악계에 기울인 애정과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대접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차후 누가 그 일을 맡게 되건 자존과 긍지로써 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격으로 따지자면 서울시장이라도 나서서 정중한 치하와 위로의 뜻을 전해야 될 것도 같지만, ‘묵살의 정치’가 판을 치는 세태에 턱없는 기대를 거는 성싶기도 하다.

 

추모의 대상을 넘어

 

윤이상 선생 유해가 고향에 돌아와 수려한 통영 앞바다를 굽어보는 미륵산 자락에 묻히는 데는 어떤 뜻이 있을까? 고인의 물리적 흔적이 특정한 지리적 공간에 보존되어 추모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계기로 그의 삶과 예술적·인간적 열정과 염원이 사람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더욱 뜻 깊은 것 아니겠는가?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홀대받지 않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도 분명 그의 염원의 일부였을 터이니, 그를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은 그런 염원마저 오롯이 공유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가 살아 있어 자신의 예술적 후예 진은숙이 저렇게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면 어떤 심정일까? 격변하는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한 탁월한 음악가의 쓸쓸하고 씁쓸한 거취가 사회적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만 지금, 윤이상 선생의 유해를 모셔오는 데 들인 것에 버금가는 사회적 예우를 그를 떠나보내는 데도 갖추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을 지울 길이 없다.

 

설준규 / 한신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2018.2.2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