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3‧1독립운동 100주년을 향해서: 한반도 평화와 일본의 ‘시민사회’를 생각하다
내가 한글의 바다로 저어나가기 시작한 1976년 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되었고, 당시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비판한 김대중 전 대통령 등 21명이 체포되었다. 그 전년 3월 1일, 시인 김지하는 ‘한일반독재공동전선’을 일본인에게 호소했고, 2년 후인 1978년에는 제2민주구국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민주구국헌장’이 발표되었다. 즉 내가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는 민주화운동과 3·1독립운동을 결부시키면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 역사로 나를 이끌었다. 나의 한국어 학습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3·1독립운동과 함께 있었다. 그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 것이 2016년 10월 이후의 촛불혁명,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진행중인, 평창 올림픽·패럴림픽으로 시작된 ‘분단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조선 3‧1독립운동』을 다시 읽다
나는 지금 히가시신주꾸(東新宿) 코리아타운 지역에 있는 ‘고려박물관’에서 내년 2월 개최 예정인 ‘3·1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패널 전시를 기획·편집하는 책임자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일본어로 읽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채택한 것이 1976년에 간행된 박경식(朴慶植)의 『조선 3·1독립운동(朝鮮三·一独立運動)』(平凡社 1976)이다. 이 책의 요약을 담당했을 때, 나는 서장 「3·1독립운동이 의미하는 것」의 첫머리에 착목했다. “1909년 10월 (26일), 조선의 애국적 의사 안중근은 ‘한국병합’을 추진한 이또오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사살했고,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뤼순감옥에서 (…) 동양 평화가 실현되지 않음을 개탄했다.” 이 책이 간행된 지 3년 후이자 이또오 암살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음을 당했다. 나아가 37년 후인 10월 하순에는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파면에 이르는 촛불혁명이 개시되었다. 이를 보며 생각건대 역사는 단순한 재판(再版)이 아닌 모습으로 되풀이된다.
이 책의 서장은 김지하의 ‘한일반독재공동전선’ 호소로 끝나는데, 그 직전에 중요한 지적이 있다. “3·1독립운동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조선 인민이 그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중요함과 동시에, 이 운동을 일본 국민이 스스로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일본 근대사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또한 진정한 국제연대를 위해서도 불가결할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이 예리한 지적으로부터 40여년, 유감스럽게도 일본 국민이 3·1독립운동을 “스스로의 문제로 인식”하는 일은 지금도 없을뿐더러 재일코리안에 대한 혐오발언이 횡행하고 있다. 3·1독립운동의 민족주의적인 면을 강조한 이 책의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위의 지적은 ‘헌법9조 개헌’을 향해 매진하는 아베 정권하에서의 일본 ‘시민사회’에 경종을 계속 울리고 있다.
촛불혁명은 현대판 3‧1독립운동
이러한 일본의 현 상황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재작년 가을 이후의 한국 촛불혁명과 3·1독립운동의 유사성이다. 일전에 나는 「일한 시민교류가 만드는 평화(日韓市民交流がつくる平和)」라는 짧은 글(『アジェンダ: 未来への課題』 2017年冬号)을 기고하면서 그 부제를 ‘촛불혁명은 현대판 3·1독립운동(キャンドル革命は現代版三·一独立運動)’으로 삼았다. 구체적으로는 “①비폭력·평화주의를 호소, ②민주공화주의의 입장, ③민족자결의 전 국민적 운동, ④여성의 진출 등 새문화운동의 전개 등을 거론하며, ‘시민이 만드는 평화’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리고 “촛불혁명과 3·1독립운동은 시대를 개척하는 새로운 정치·사회·문화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는바, “온고지신을 가슴에 새김으로써 지금이야말로 100년 전에 제시된 과제에 부응해가는 자세로 미·북 핵위기의 현실을 마주하는” 일한시민교류가 필요한 때임을 주장했다. 더해서 오늘, 전인권 등 남녀노소 가수와 시민들이 「이매진」(imagine)을 함께 부르며 촛불로 비둘기를 그린 장면으로 대표되는, 평창올림픽에 담긴 ‘평화에 대한 마음’을 강조하고 싶다.
남은 과제는 촛불혁명의 연장선으로서의 ‘남북의 평화공존’(분단·대립도 아니고 흡수·통일도 아닌)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그 성공 여부는 올해 6월로 예정된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좌우될 것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이 실현될지 말지도 한국 시민사회의 동향에 달려 있다 해도 좋겠다. 동시에 그것은 일본의 ‘시민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역사적 의미, 또는 배경을 간단히 지적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남북의 평화공존’과 일본의 시민사회
지난 주말, 어떤 연구회에서 ‘미·북 핵위기와 현대 일본의 평화운동: 한일시민교류라는 활로’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시론(試論)’으로서 ‘현대 일본의 분단통치와 재일코리안’이라는 연구과제를 제기했다. 거기서 현대 일본의 ‘분단통치’를 네가지 단계로 나누어 지적하면서, 이른바 ‘문화정치’란 일제 식민지배의 기저로 된 ‘분단통치’이고 오늘날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는 인식을 제시했다. 그 네가지 단계란 ①일본과 코리아(한반도)의 분단(3·1독립운동 후의 동아시아), ②전후 남북코리아의 분단에 따른 재일코리안 내의 분단(민단/총련), ③재일코리안 내의 분단에 따른 일본인과 재일코리안의 분단(혐오발언), ④전후 남북코리아의 분단에 따른 일본과 코리아의 분단(혐한/반북)이고, ①부터 ④까지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을 어떻게 선순환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그 열쇠는 한일 시민교류에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는 좋든 싫든 자신의 경제생활을 제일로 삼는 ‘생활평화주의’였고, 구미 이외의 여러 외국, 특히 가까운 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무관심해서 20세기 이후의 역사를 학교나 사회에서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일본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지만, 일본사회가 스스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재생·부활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그 활로는 전후 70년 이상에 걸쳐 익숙해져버린 ‘동북아시아 냉전체제=한국전쟁체제’의 붕괴이다. 그것은 남북코리아가 1민족 1국가식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하에 점진적 통합을 진행함으로써 실현될 터이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일본의 ‘시민사회’도 성장해갈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평화가 정착하는 ‘남북의 평화공존’과 함께 ‘한일시민교류’의 활성화가 실현할 때, 일본 시민사회도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사적인 체험이라서 죄송하지만, 42년 전 한국어 학습과 함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한 근현대의 일본사, 동아시아사를 학습한 것이 내 인생을 바꿨듯이, 일본의 ‘시민사회’에도 2020년대에는 대전환기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아오야기 준이찌(青柳純一) / 번역가, 코리아문고 대표
(번역: 신승모)
2018.2.2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