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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합의된 것부터 먼저 하라

이기우

이기우

헌법은 정치의 내비게이션이다. 자동차 운전자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하듯이 정치는 헌법의 지침에 따라 운영된다. 내비게이션에 문제가 있으면 운전자가 헤매게 되듯이 헌법에 문제가 있으면 정치가 엉망이 된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국민을 절망시키는 것은 정치의 방향과 절차를 정하는 헌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나 경제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거나 국민의 정치불신이 높을 때에는 헌법개정을 요구하게 된다.

 

정치가 안정되고 국가경쟁력이 높은 스위스나 독일의 경우를 보면 거의 매년 헌법을 개정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연방헌법이 1949년 이후 60여 차례 개정되었고, 스위스에서는 1848년 이래 200번에 가까운 헌법개정이 있었다. 주헌법까지 포함하면 거의 매년 수차례의 헌법개정이 이루어져왔다. 미국 연방헌법은 1787년 이후 18차에 걸쳐 개정되었지만 뉴욕주 헌법은 1938년 이후 228차례나 개정되었다. 헌법이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개정해주어야 한다. 마치 길이 새로 생기고 교통체계가 바뀌면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 하듯이 헌법도 헌법현실이 바뀌면 그때그때 개정을 해야 한다.

 

30년간이나 방치된 헌법

 

헌법개정은 일상적인 정치과정이 되어야 한다. 상시적으로 헌법을 점검하고 문제가 있으면 개정을 검토해야 한다. 헌법을 자주 바꾸면 안 된다는 것은 헌법에 대한 미신일 뿐이다. 헌법은 다른 모든 법률과 국가활동에 기준을 제시하는 최고법이기 때문에 세심한 관리와 손질이 필요하다. 우리는 헌법을 30년이나 손질·관리하지 않고 정치세력끼리 세력다툼을 하느라 방치해왔다.

 

촛불혁명 이후에 모처럼 찾아온 개헌정국마저도 표류하고 있다. 국회에서 여야가 헌법을 개정키로 합의하고 헌법개정특위를 구성한 지도 1년 2개월이 훌쩍 넘었으나 아직 초안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참여 헌법개정을 표방하고 전국적으로 공청회를 열었지만 개정초안이 없는 상황에서 중구난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일부 야당은 권력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개헌을 저지하겠다고 하면서도 권력구조의 개편방안조차 제시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개헌에 관한 국민투표를 지방선거와 동시에 할지 그후로 할지에 대해서도 여야 간의 심각한 대립이 있다.

 

대통령은 기본권과 지방분권 등 합의가 되는 분야부터 헌법개정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대통령 소속의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헌법개정안 초안을 준비하고 있으며 3월 13일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다. 대통령은 국회가 합의하지 못하면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현행 헌법개정 절차에 의하면 헌법개정안은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 찬성 또는 대통령이 제안하여 국회의원 재적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국민투표에 회부되어 결정될 수 있다. 대통령이 헌법개정안을 제안한다고 하더라도 국회 재적 3분의2 이상의 찬성이 없으면 헌법개정은 실패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개헌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개헌이 더 어려워진다. 오히려 여야 간의 협상을 촉진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좀더 현실적이다.

 

일부개헌, 현실적이고도 바람직한 방안

 

현재 논의되고 있는 개헌 의제 중에는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도 있지만 아직 논의가 성숙되지 못하고 의견대립이 심각한 부분도 있다. 우리의 정치와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은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부터 먼저 개정하는 것이다. 모든 의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다보면 논의가 덜 된 부분 때문에 합의가 된 부분까지 개헌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국회의결이나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의 일부 내용에는 찬성하지만 다른 일부 내용에는 반대하는 경우 결정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합의가 어려운 내용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제외하고 개헌안을 발의하여 표결에 붙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같은 날 여러개의 일부개정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것도 가능하다. 전면개정은 여야 간 합의도 어렵고 국민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기도 어려운 반면 일부개정은 비교적 합의가 용이하고 민의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다. 여러번의 일부개정이 모이면 전면개정이 된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문제되는 모든 헌법조항을 한꺼번에 손보는 전면개정은 극히 예외적이다. 일부개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헌법개정을 자주 하는 것이다.

 

만약 정치권의 무능으로 일부개헌도 불가능하다면 개헌절차에 관한 규정만이라도 개정해야 한다. 현행 헌법개정 절차는 여야합의가 없으면 개헌안이 발의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헌법개정안을 발의하지 못하면 70만명 정도의 국민이 서명해 헌법개정안을 발의하고 국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대표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안 하는 경우에 국민이 직접 나서서라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국민 스스로 주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다. 이번 개헌정국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국민의 정치불신은 위험수위에 달할 것이다.

 

이기우 /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8.3.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