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촛불의 따뜻함, 평화의 봄바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마저 갈라놓은 휴전선을 넘어 연이어지는 광폭 행보가 한반도에 봄을 가져올 것인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의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하더니 한국의 대북특별사절단이 북을 방문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국 특사단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회담을 갖는 파격을 연출하더니 특사단과 남북정상회담 및 한반도 비핵화 등 예상을 뛰어넘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어 특사단이 미국에 가져간 ‘북미대화’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북미정상회담이라는 최상급으로 격상됐다. 하나하나가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숨 쉴 틈도 없이 가파르게 이어졌다. 이 행보들이 한반도 평화로 귀결될 것인가.
얼마 전까지도 말폭탄을 주고받던 남·북·미가 반전을 이뤄낸 일은 어떻게 된 것일까?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까지 벌어진 놀라운 일들이 과연 항구적인 평화와 비핵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남북 간의 대결, 북미 간의 적대, 한반도를 에워싼 신냉전의 냉기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촛불혁명이 전쟁을 평화로
정의용 안보보좌관을 수석특사로 한 대북특별사절단이 김정은 위원장과 합의한 내용들은 한반도를 들썩이기에 충분하다. 남북정상회담이야 ‘떼어놓은 당상’이었다고 해도 한국과의 협상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고 이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은 엄청난 변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북은 핵문제는 한국과 논의할 수 없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협상탁 위에 올려놓는 것조차 거부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북이 특사단을 앞에 두고 김정은 위원장의 입으로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은 예상하기 어려웠던 변화다. 그보다 더 놀랍고도 놀라운 변화는 김정은 위원장이 한미연합훈련을 이해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부분이다. 심지어 한반도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는 입장조차도 2016년까지 공언했던 것을 되살린 것이지만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이해한다는 언명은 단 한번도 없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매해 봄과 가을 한국과 미국이 군사훈련을 진행할 때마다 강하게 비판하던 북이 이렇게 입장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일면적으로는 북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핵무력’을 완성했으니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해도 무서울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핵무력을 더욱 강하게 붙들고 있어야지 왜 비핵화를 얘기했을까? 이 설명은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와 한미군사훈련을 동시에 받아들였다는 변화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마찬가지로 북이 반대급부로 경제제재 철회·완화나 경제협력·지원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최대의 압박’이 북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약하다.
북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남과 북은 같이 긴장하기도 하지만 같이 풀어지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전향적 자세를 보이기 전에 한국이 평화를 내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15경축사에서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 절대 전쟁을 막겠다”라며 선제타격 및 예방전쟁론과 선을 그었다. 이어 11월에는 유엔총회에서 평창올림픽 휴전결의 채택을 주도하여 동계올림픽을 전후해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12월에는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때까지 한미군사훈련을 연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개하고 이를 미국정부에 제안하는 등 구체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문재인정부의 평화지향적 발언과 행동은 올 1월 초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를 발표하며 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전향적 입장을 보일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였다. 그 직후인 1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평창올림픽 이후에 실시한다고 합의하여 구체적 행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사실 문재인정부의 이러한 발언과 행동은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 한국 국민에게도 많은 희망”이 된다는 작년 10월의 대통령 발언과는 다른 놀라운 변화였다. 촛불정부의 놀라운 변화가 북의 놀랍고도 놀라운 변화를 견인한 것이다.
촛불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북은 촛불정부에서 평화의 실마리를 보지 않았을까. 이러한 정부를 만들어내고, 그 정부가 촛불정부로서 발언과 행동을 하도록 추동하는 시민사회의 힘을 느끼지 않았을까. 한국사회가 이 정도로 변했다면 북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안감도 다소 해소되지 않았을까. 촛불시민의 힘에 기초하여 남북 간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면 굳이 핵무기에만 의존하여 안보를 지키려 할 필요 없이 미국과도 평화협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촛불은 대한민국에 봄을 가져왔다. 그 따뜻함으로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은 다시는 ‘겨울공화국’으로 퇴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촛불시민이 만들어낸 촛불정부는 이제 반세기 넘게 얼어 있는 ‘겨울 반도’를 녹이기 시작했다. 이 봄바람이 일장춘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촛불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촛불혁명이 ‘적극적 평화’를 만드는 시민혁명이라면(졸고 「촛불과 평화」, 창비주간논평 2017.11.1), 이제는 시민의 힘으로 남북관계도 더 평화롭게 발전시켜야 할 과제가 발등에 떨어졌다. 남북기본합의서, 6·15선언과 10·4선언을 제도화하라는 시민의 요구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정상회담 정례화, 각급 남북회담으로 실질적인 국가연합을 이루고 제도화된 평화체제를 만들어 한반도가 다시는 대결의 동토로 퇴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남북평화체제는 북과 미국의 평화협정을 담보하는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인 안전보장이 될 것이다. 이러한 남·북·미 평화체제 속에서 한반도 핵문제는 소멸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미군사동맹이나 주한미군, 한미군사훈련은 더이상 큰 변수가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시민과 정부가 원하는 대로 조정하면 될 일이다. 이참에 동북아시아 평화·협력기구까지 만들어낸다면 한반도 평화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꿈은 크게 꾸자. 꿈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잊지 말자. 그 꿈의 주인은 촛불시민이다. 그 꿈의 힘은 촛불에서 나온다.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2018.3.2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