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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엄마와 ‘나쁜’ 시민의 조합: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쓰리 빌보드」

황정아

황정아

과거의 엄혹한 상황을 다룬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 인물상으로, 지하 취조실 같은 데서 누군가를 죽도록 패다가 잠시 쉬는 사이 애타게 자식 걱정을 늘어놓는 ‘나쁜’ 시민이자 ‘좋은’ 아버지가 있다. 이때 좋고 나쁘다는 판단은 물론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좋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좋은 시민이었다고 믿을 사람도 백만명 중 한명쯤은 여전히 있을지 모르고, 나쁜 시민이기에 궁극적으로 나쁜 아버지였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가령 독재정권에 맞선 ‘좋은’ 시민이 자식까지 살뜰히 보살피는 ‘좋은’ 아버지로 그려진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그만큼 전형적이지는 않다. 일단 그들의 삶은 예의 그 지하 취조실에 잡혀갈 가능성 때문에 좀처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좋은 아빠의 길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시민의 조합에서 전형은 어떤 모습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좋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좋은’ 시민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다. 고(故) 이소선 여사에서 세월호참사 유가족 어머니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알려지거나 그렇지 않은 숱한 인물들이 ‘좋은’ 어머니와 ‘좋은’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근원적이고도 실질적인 연관성을 환기시킨다. 이렇듯 전형의 차이에 내재된 젠더 차이도 얼마간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 글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다. 여기서는 최근 개봉한 영화 두편이 그리는 어머니와 시민의 색다른 조합과 거기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잠시 생각해보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엄마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 2017년 제작)에서 여섯살 주인공 무니(Moonee)의 엄마 핼리(Halley)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인물이다. 스트리퍼였으나 그마저 대책 없이 그만두고, 우리로 치면 고시 준비와 무관하게 고시원에 살듯이 여행과 무관하게 싸구려 모텔에 장기 투숙하는 처지이면서도 미래를 전혀 도모하지 않는다. 대개 약에서 덜 깬 표정으로 모텔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일하는 동안 아들을 봐주는 댓가로 이웃 엄마가 식당에서 빼돌려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숙박비를 지불할 때가 가까워져서야 근처 리조트 여행객들에게 ‘야매’로 향수를 팔기도 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성매매에 나서고 ‘고객’의 물건을 훔친다. 그뿐이 아니다. 수틀리면 음료수를 쏟아붓거나 주먹질을 하고, 그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도우려는 모텔 매니저에게 고마운 줄 모르고 피 묻은 생리대를 들이대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정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핼리가 ‘좋은’ 엄마로 느껴지는 것이 이 영화가 구현한 마법 같은 진실이며, 모텔과 한 동네에 있는 (그리고 모든 면에서 그 대척점에 있는) 세계적 테마파크 디즈니랜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이다. 밑바닥에 가까운 그녀의 삶에서 흐릿하나마 반짝임이 있다면, 구제불능의 악동인 듯해도 여리고 취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어린 딸 무니와 보내는 시간이다. 놀랍게도 핼리는 미래를 도모하는 노고를 포기하는 대신 딸과 보내는 현재의 시간을 불평하지 않는다. 그녀가, 너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고 있어,라는 무언의 암시로 무니의 어린 심장을 부수기는커녕, 너와 함께여서 즐거워,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하는 것이야말로 무니의 삶이 그토록 생기발랄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런 의미로 핼리가 좋은 엄마라 쳐도 (좋든 나쁘든) ‘시민’이란 그녀에게 적용하기에 다소 난데없는 개념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사회란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순 없다. 무니를 잘 보살피겠다는 복지당국이 왜 핼리는 이토록 외면하는가. 아이를 ‘나쁜’ 시민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에는 그토록 열심인 사회가 왜 아이의 ‘좋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 지원하지 않는가.

 

‘나쁜’ 시민이 되기로 하는 이유

 

사뭇 다른 분위기의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년 제작)의 엄마 밀드레드(Mildred)는 당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강단 있는 인물이다. 딸의 강간살인사건을 몇달째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 데 항의하고자 마을 진입로에 서 있는 세개의 거대한 광고게시판(빌보드)을 빌려 보안관 윌러비(Willoughby)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올린다. 평판도 좋고 알고 보면 인품도 갖춘 윌러비는 암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밀드레드를 이해해주고 익명으로 빌보드 대여료까지 지원하지만, 그의 추종자이자 경찰인지 깡패인지 식별되지 않는, 이른바 ‘극우 꼴통’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딕슨(Dixon) 경관은 그녀를 비롯하여 한줌마저 안 되는 그녀의 조력자들을 윽박지른다.

 

이 모든 난관에도 밀드레드는 대체로 거침이 없다. 빌보드의 메시지에 항의한 치과의사를 찾아가 드릴로 손가락을 뚫어버리고 빌보드가 불타자 무려 경찰서를 방화하여 (본의는 아니지만) 딕슨에게 심한 화상을 입힌다. 일찍이 이렇듯 과격하게 ‘나쁜’ 시민이 되기를 선택한 엄마가 있었던가. 몇가지 세부를 괄호에 넣으면, 밀드레드는 자식을 잃고 치안당국을 불신한 채 몸소 ‘정의구현’에 나서는 아버지 ‘자경단’(vigilante) 유형을 연상시키며, 따라서 그녀의 형상화는 일정하게 미러링(mirroring) 기제의 산물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딕슨과 연합하는 것은 그러므로 꽤 자연스런 귀결이 된다.

 

딸의 생전에 자상한 엄마는 아니었을망정 딸의 죽음을 규명하는 데 혼신을 다하는 밀드레드는 분명 ‘좋은’ 엄마이며, 윌러비의 유언 같은 편지를 받고 ‘개심’하여 밀드레드를 돕는 딕슨에게도 딱히 시비를 걸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오히려 깊어지는 불안감은 두 사람의 연대가 더해진 ‘자경단’풍의 사회가 결국 엄마들을 위한 사회, 딸들을 위한 사회일 수 없다는 직감에서 비롯된다. 그 점은 무엇보다 밀드레드 자신이 맞닥뜨리는 (그리고 앞으로도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 폭력의 위협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의 어조가 어떻든 그녀가 체현한 ‘좋은’ 엄마와 ‘나쁜’ 시민의 조합을 돌파보다 좌절로 보아야 할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윤리적 올바름이나 정치적 올바름을 잣대로 이 엄마들을 평가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엄마와 시민의 참신한 조합형을 찾아내는 게 대수도 아니다. ‘좋은’ 엄마들이 ‘나쁜’ 시민이 될 필요도 이유도 없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낼 것! 여러 방식으로 음미할 수 있는 두 영화를 무엇보다 이런 호소로 읽게 되는 것도 한국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의 작은 여파인지 모르겠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8.4.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