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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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염원과 기대

정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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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있어서 제1의 조국은 언어이다. 우리는 일제에 의하여 36년 동안이나 언어공동체를 빼앗겨왔고, 되찾은 후에도 61년 동안이나 언어영토가 분단된 환경에서 살아왔다. 우리의 언어공동체를 분할 관리하고 있는 두개의 정부와 정치체제에 대해 우리 작가들은 언제나 민족공동체의 명운을 우선에 두고 사고하라고 촉구해왔다. 우리 민족은 더이상 위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반전반핵은 작가들의 오랜 슬로건이었다. 상황이 어렵더라도 우리 작가들은 한반도 주민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작가적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자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 민족의 실존적 운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북은 추가 핵실험을 자제하고 6자회담에 즉시 복귀하며 미국은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화에 임해야만 한다.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인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할 수 있는 털끝만큼의 가능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모국어공동체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금강산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2006년 10월 29일 아침 8시, 금강산행 버스에 오르기 직전 기자들을 상대로 읽었던 ‘보도문’이다. 이 보도문을 주목하고 보도한 언론사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 작가들이 금강산에 갔던 까닭은 ‘6.15민족문학인협회’라는 남북작가 단일조직을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실험 때문에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비난이 쓰나미급으로 몰려오자 내부에서도 찬반양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우리는 금강산에 갔고 ‘6.15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했다. 금강산에서 돌아오는 10월 31일,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환호했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도문의 문장을 써내려가던 그날의 마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참 간절했었다. 나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후천(後天)의 시대를 여는 회담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선천(先天)은 전쟁과 학살, 증오와 투쟁, 죽임과 차별, 개발과 파괴로 점철된 상극의 시대였다. 후천은 평화와 협력, 화해와 소통, 살림과 존중, 성숙과 나눔으로 채워질 상생의 시대이다. 지난 19세기부터 20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우리 민족은 선천의 상극으로 말미암아 분단과 전쟁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분단체제가 바로 상극의 선천시대였다. 이제 상생의 후천시대로 가야할 때가 왔다. 후천시대는 통일체제로 이행하면서 열리게 될 것이다.

 

분단체제에서 통일체제로

 

후천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첫째,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져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은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다. 한반도 핵과 미사일의 갈등은 동북아시아 핵과 미사일의 갈등의 일부이다. 또한 전세계 핵무기 비확산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의 비핵화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각종 핵위협을 제거하는 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 핵위협을 상호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이다. 동북아시아 전체가 상극의 선천시대에 머물러 있는데 한반도에만 후천이 열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70여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한국전쟁을 끝내야 한다. 한국전쟁은 전선의 전쟁을 넘어서 마을 내부의 전쟁이었고 마음의 전쟁이었다. 그리하여 사람에 대한 증오는 깊어졌고 개인의 내면은 성숙을 방해받았다. 군사적 충돌은 휴지기에 놓여 있지만 이념의 과잉은 점점 확대되었고 증폭되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미움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내면의 증오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은 기득권층의 정치과잉은 여전히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증오의 정치과잉을 끝내고 내면의 성숙과 공동체의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한국전쟁의 종식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셋째,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 “마음공부가 어느 정도 된 사람들이 통일사업을 하고 사업의 과정 자체가 공부감이 되지 않고서는 이 전대미문의 과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백낙청은 말했다(『백낙청 회화록 5』, 창비 2007, 175면). 통일과정의 훈련기에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면화된 분단체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통일과정의 마음공부는 객관적 실재를 주관적으로 왜곡하고 편집하는 정치과잉, 이념과잉을 비워내는 데에 있다. 내면 가득한 이념과잉이 비워지면 비로소 밑도 끝도 없는 증오들이 사라지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마음공부를 통해서 서로를 존중하고 소통하는 법을 철저하게 배워야 하고, 화해협력도 마음훈련을 거듭해야 가능하다.

 

모두의 마음을 모아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선천의 시대를 끝내고 후천의 시대를 열어가는 기초회담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한 선량한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랜 단절과 극단의 대치상황 이후에 재개되는 남북정상회담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전인류가 생중계 화면을 주목하는 까닭은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세계사적 전환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이다. 연초록의 잎들이 대지의 중력을 뚫고 올라와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고 있다. 신록은 꽃보다 장엄하다. 비로소 ‘봄이 온 것’이다. 앞으로 이틀 후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을 중계화면으로 보는 즉시 울컥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니다. 정상회담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 여기저기서 기도했다는 응답들이 왔다. 우리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봄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정도상 / 소설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상임이사

2018.4.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