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분단 없는 삶을 준비하자
한반도에 다가오던 전쟁의 먹구름이 갑자기 걷히고 있다. 70년 분단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도래한 느낌을 받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분단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분단을 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이 없다. 비유하자면 감옥에서 평생을 살던 이에게 갑자기 감옥 문이 열리고 있는 격이다. 벌써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이 떠오르지만 그것을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지는 모두 미지수이다. 우리는 어떻게 분단의 감옥에서 나가고 어떻게 분단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한반도 평화의 문이 열리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일단 문이 얼마나 열려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문이 열렸다길래 나가보니 더 두껍고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평가의 핵심인데, 남북정상회담은 일단 밖으로 나가는 문을 절반 이상 열었다. 이는 남북 정상이 합의한 선언문에 잘 드러난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라는 제목에 평화, 번영, 통일 등이 남북이 나아갈 방향으로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선언문에는 이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다. 특히 1항과 2항의 내용은 남북 간 기존 합의의 연장선 위에 있어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실행에 큰 문제는 없다. 문제가 있다면 대북제재 국면에서 이러한 합의를 실천할 수 있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한 방법과 일정표에 유관국들이 합의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여기서 3항의 내용을 두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북의 핵폐기와 관련한 구체적 약속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조심스러운 반응 혹은 야당 일각의 막가파식 반대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간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북핵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한 이후 남북 간 합의에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가 포함된 선례가 없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내용이 남북정상선언에 포함된 것만으로 남북관계의 중요한 진전인 것이다.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반복하고 핵보유국 지위를 강하게 요구했던 불과 얼마 전까지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조심스러움을 넘어 핵폐기와 관련한 구체적인 약속이 없다는 이유로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정치쇼”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략적 주장을 넘어서 무책임한 주장이다. 북의 핵폐기가 북의 일방적인 행동이 아니며 그에 상응하는 조치들, 특히 체제안전에 대한 북한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미국의 조치들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즉 비핵화는 아직 협상 과정에 있다. 이마저 부정하고서 북한의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한다면 작년까지의 상황, 즉 군사적 대립의 고조와 전쟁위기라는 결과만이 우리를 기다릴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야당의 막가파식 주장이 원하는 결과일 수도 있고 협상을 파탄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미 선을 넘고 있는 것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앞으로 계속 주목해야 한다.
풀어야 할 과제를 차분히, 점진적으로
이제 미국과 한국이 북의 핵폐기에 어떤 상응 조치들을 내놓고 비핵화 프로세스에 진입할 것인가가남아 있는 그리고 핵심적인 과제이다. 미국과 북한 모두 아직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북미정상회담은 북미가 상대의 마지막 카드를 확인한 상태에서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 결정되는 무대이다. 만약 북한이 핵폐기의 가능성을 제시한 상황에서도 양국이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협상의 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무기 능력을 고도화한 상황에서 미국과의 협상이 과거와는 다른 구도로 전개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핵폐기 의사를 진지하게 전달함으로써(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 이후 그와 트럼프가 계속 북의 입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을 협상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미국이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쪽에 베팅하면서 북한에 대한 체제안전 보장 방안을 제시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과 달리 판이 커진 북과의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협상이 순조롭게 진전되고, 분단 감옥의 문이 열리고 있다면 바깥세상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평생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분단 상황에서 살아온 탓에 분단의 관습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과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반도 분단은 단순히 물리적‧지리적으로 분리된 상황이 아니며, 남북 내부에 남북 대립으로부터 이득을 보고 이를 재생산하는 요소들이 뿌리 내린 상태에서 유지되고 강화되어왔다. 단순히 분단이 아니라 분단체제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적당히 분단을 관리하려는 식의 태도로는 영원히 분단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 이런 식으로는 분단의 대립을 재생산하는 내부 요소들을 청산할 수 없으며, 이같은 요소들이 남아 있는 한 남북관계를 다시 대립적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들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류와 협력이 증가하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교류가 증가한다고 상호 이해와 신뢰가 꼭 증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류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와 갈등요인이 등장해서 화해협력에 장애를 조성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단순히 교류 확대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를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지속가능한 새로운 체제로 대체하는 작업을 같이 진행해야 한다.
새로운 체제의 핵심은 남과 북이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남북관계를 제도화해가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민족이니까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설득력도 떨어지는 논리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 관계로 전환시키면 대립이 해소되고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도 문제이다. 남북 사이에는 국가관계로 처리하기 힘든 문제들이 많다. 예를 들어 서해상의 남북 경계 문제만 해도 국가관계라면 국경을 확정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이는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 시대에 뒤떨어진 통일논리도 아니고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한 논리도 아닌, 한반도 현실에 부합하는 남북통합 방안으로 남북연합이 이미 제기되어 있다. 이는 대외적으로 국가성을 인정받은 두 정치실체가 특수한 방식으로 내부의 통합성을 높여가는 과정을 관리하는 제도이다.
특수한 방식의 핵심은 점진적‧단계적 방식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전체적 통합의 수준은 남북연합이라는 틀 내에서도 큰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영역에 따라 일반적인 국가간관계보다 통합수준이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다. 일단 “판문점선언” 1항의 ②(고위급 회담을 비롯한 각 분야의 대화와 협상), ③(남북공동연락사무소), ④(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 ⑥(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 관련 합의만 충실하게 이행해도 한반도는 남북연합 단계로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틀에서 남북의 통합 수준을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과정을 한반도식 통일이자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과정 속에서만 한반도에서 전쟁의 근원을 제거해가고 남북 주민의 삶의 질을 높여가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
시민의 힘이 진정한 동력
이때 시민의 역할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남과 북 사회 내부에서 분단체제를 뒷받침해온 제 요소를 혁파하고 시민 스스로가 분단체제 극복의 주체로 설 때 남북연합이 제대로 작동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진전될 수 있다. 아래로부터 형성된 힘의 뒷받침이 없이는 당국자 간의 합의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김정은 위원장이 핵폐기를 협상테이블에 올려 남과 미국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선 데에는 촛불혁명을 거친 한국이 수구적 행태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며, 한국정부가 남북관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데에도 촛불의 힘이 작용했다는 지적(서재정 「촛불의 따뜻함, 평화의 봄바람」, 『창비주간논평』 2018.3.21)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나 기대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는 것도 시민사회가 과거의 프레임으로 남북관계를 생각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시민사회에서 명확한 전망에 입각해 남북관계의 변화에 참여하려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는 지난 10년간 남북관계가 단절된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판문점선언”과 이어지는 북미정상회담이 새롭고 매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는바, 가만히 박수만 칠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진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남북의 교류가 확대되는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어떻게 전환시키고 시민의 역할을 어떻게 늘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세우면서 한반도 대전환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여기에 남북연합을 거치는 남북통합이라는 비전이 중요한 참조항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남주 /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2018.5.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