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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사랑의 방식: 사이토 마리코 시집 『단 하나의 눈송이』

단 하나의 눈송이 100사랑에 걸맞은 어떤 태도나 자세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를 하나씩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 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 거짓말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맞을 때까지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눈보라」 부분

 

얼핏 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존재들 속 오직 하나의 존재를 발견하는 일. 단 하나의 눈송이를, 그 유일무이를 알아보는 일. 바라보는 일. 그리고 묵묵히 사랑하는 일. 그 사랑은 “끝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눈”(「광합성」)과 같아 결코 한 존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그러므로 지지 않는 것이다. 응시의 궤도를 지나 어느 순간 “눈뜬 사람들 속에서 홀로 명목(瞑目) 하는 사람”(「광합성」)이 된 이를 이길 도리란 없으므로.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눈송이를 운명으로 명명하는 이 순정한 ‘내기’에서 애당초 패자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결국 모두가 “이루어질 때의/약속”(「첫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이토 마리코(齋藤眞理子)는, 그의 무구한 화자는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구태여 ‘실천’이란 말을 붙인 까닭은 그가 실로 온몸, 온 마음으로 사랑을 행해 보이기 때문.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나이를 넘어 있었습니다/그것을 잊은 채로 당신의 나라에 와버렸고/잊은 채로 당신의 학교에까지 와버렸습니다”라는 그는 “이제 (…) 저는 당신의 말 앞에 서 있습니다/실현될 때 말은 빠릅니다/빛처럼 실현될 때/말은 운명입니다”(「비 오는 날의 인사」)라고 고백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나라’는 어디인가. 시에서 지목하는 “윤동주”나 “조선” 같은 대상을 대입할 수도 있겠지만, 끝내 특정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당신의 종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끊임없이 걸어온 이다. 지금에 이르러 그가 “당신의 말”과 마주한, 혹은 그보다 한걸음쯤 더 앞선 자리에 서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경우 사랑은 실로 모든 것이다. 한 사람을 향한 것이기도, 한 공간과 시절을, 또 한 언어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사이토 마리코는 1991년 봄부터 1992년 초여름까지 한국에 머물렀고, 그 1년 2개월 동안 한국어로 시를 썼다. 1993년 한국어 시집 『입국』을 출간하며 적잖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최근 재출간된 『단 하나의 눈송이』(봄날의책 2018)에는 『입국』의 기록, 그러니까 당시 갓 서른의 문턱을 넘은 사이토 마리코가 경험한 서울, 9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을 가만히 더듬다보면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지극한 사랑의 얼굴이다. “사람 속에서 둘러보는 눈과/사람 속에서 쳐다보는 눈이/맞을 때 불꽃이 돋는다”(「도시」)는 운명론적 지각은 결코 과장이라 할 수 없다. 그 불꽃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나의 말’이 아닌 “당신의 말”, 즉 새로 익힌 사랑의 언어로 시를 쓸 수 있는가. 막 사랑에 빠진 그의 표현은 몇몇 페이지에 이르러 다소 서툰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서툴기 때문에 도리어 완벽에 가까워지는 일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마침 사랑이 그런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일은 때때로 지독한 병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지. “사람에게서 나무에게로 옮는 병이 있다.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다는 병. 이 거리의 내력을, 이 땅의 모든 내력을 빠짐없이 배고 싶다는 병. (…) 고(告)하고 싶다는 병”(「미열」) 말이다. 병으로 충만한 그는 ‘그때 그곳’의 풍경을 이렇게 고한다. “먼지와 배기가스와/이대 앞 다니는 아가씨들의 진한 화장에 싫증이 나며/최루탄 냄새로”(「바람개비 2」) 울게 된다고. 사람들은 “어깨만이 돼서 부딪쳐 간다”(「서울」)고.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른 나무들이 다 벌거벗게 된 다음에도 푸른 잎사귀를 살랑거리”(「광합성」)는 나무는 힘이 세다. 특유의 지고지순함으로 광포한 세계를 껴안는다. 그는 스스로 일상의 안식처를 자처한다. “하루가 작은 새 한 마리라면/나는 그 긴 홰이고 싶다”(「난류」)고.

 

급기야 이렇게 읊조린다. “나중에 서울이 생각날 때/덕수궁도 63빌딩도 남산타워도/생각나지 않으리라 덕수궁 앞에 내리는 가랑잎/그것은 생각나리라 가을이 되면 그러나/밤마다 길마다 반짝거린 유리 조각들이 더 생각날 거다”. 이어 “왜 서울에서는 날마다 이렇게 많은 유리 조각들이 깨지는가” 탐문하는 그는 곧 “산산조각이 되었지만 거울 조각 하나하나가/하나씩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완전히 깨진 손거울이/오월의 하늘을 받으면서/조각 하나하나가 완벽했다”(「유리 조각」)고 힘주어 말한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증언하듯이.

 

한국을 떠난 후 더는 시를 쓸 수 없었다는 사이토 마리코. 그는 2011년 후꾸시마 원전 사고를 겪어내는 동안 잠시 시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랑이 발 딛고 선 세상은 이따금 위태롭고, 그럴 때 비로소 이 신실한 사랑의 신자에게 신앙은 응답하는 것일까. 「2011.6 후쿠시마에서」를 비롯 그때 찾아온 세편의 시가 이번 시집 끝자락에 실렸다. 마지막 시 「2015.5-2」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모든 이야기가 이미 오래전에 순조롭게 끝난 모양이며/이제 내가 덧붙여야 할 말 한마디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진짜 마지막으로 전하고자 하는 말을 묻는다면, 그 한마디는 아마 “살아 계세요”(「살아 계세요」)일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면 된다. 어쩌면 가장 지극한 사랑은 다만 살아 있는 것. 내가 그렇듯 당신 또한 “그 자리에서/끝없이 끝없이 살아”(「지열」) 있기를 바라는 것.

 

박소란 / 시인

2018.5.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