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분단 너머의 삶과 커먼즈
촛불혁명은 혹시나 단순한 정권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닌가 했던 일각의 우려와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어,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사건과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그중 단연 첫손에 꼽을 일은 지난 4월의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일 것이다. 지난해까지도 전쟁의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웠던 한반도에서 남북 정상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에 힘쓸 것을 합의했고, 무엇보다 서로 손을 잡고 가볍게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은 남북 간 적대의 장벽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도 있겠다는 실감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핵실험장 폐기 같은 구체적인 조치들을 약속한 북한의 유연하고도 전향적인 태도와 함께 북미정상회담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양상 역시 이번에야말로 분단 70년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오리라 기대하는 근거가 되어주고 있다. 한반도의 시간은 갑자기 빨리 흐르기 시작했고,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이 피어나는 중이다.
그러한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물론 필수적이지만, 바라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세상도 없다. 촛불혁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정치세력의 시대착오성과 부실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요즘이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분단의 현실은 평화로운 한반도를 염원하는 많은 시민조차도 분단의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다. 분단은 체제가 되었고, 남북 간의 노골적 적대를 반기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안정화된 분단현실을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한 민족이니까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자는 주장은 이미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남한에서는 더이상 받아들여지기도 어렵지만 내걸어서도 곤란한 구호가 되었다. 그렇다고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고 개별적인 국가로서 공존하면 된다는 발상 역시 남북 분단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복잡한 현실을 도외시하는 회피적 사고이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진전된다고 해도 분단체제가 가지는 체제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끈기와 지혜, 결단을 필요로 할 분단체제 극복 과정을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분단의 체제성에 대한 인식이 당장 긴요한 것은 지금 남북한에 흐르는 평화의 기류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균일하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북 성주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바로 전날 국방부가 사전 협의 없이 사드 기지 진입을 시도하면서 주민들과 충돌했다. 사드 배치의 명분이 북핵 위협이었음을 기억한다면 회담 이후에도 경찰 병력과 계속 대치하고 있는 주민들이 지금 느낄 복잡한 심정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제주 강정에서는 미군 핵잠수함이 출입하는 현실이 그대로인데도 이미 평화가 온 걸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늘어난다면 해군기지 반대투쟁이 고립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물론 한반도가 비핵화되고 평화체제가 자리를 잡아간다면 이들 기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궁극적으로 보탬이 될 터이긴 하다. 그러나 평양냉면이 유행하고 유럽횡단여행의 꿈에 부푼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전쟁 위협과 안보를 명분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통받는 이웃들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감각일 것이다.
사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흥분의 열기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지워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도 있다. 한국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위계관계와 그 속에서 묵인되고 심지어는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지속되어온 성폭력을 고발한 미투운동의 지지자들은 언론의 관심이 온통 남북의 정상에게로 쏠린 현 상황에 대해 물론 남북관계의 급진전이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두렵기도 하다고 토로한다. 또한 인권조례의 폐지를 주도해온 세력 가운데 하나인 자유한국당의 지지도가 급락했음에도 보수기독교의 압력에 못 이겨 인권조례를 폐지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은 과연 현실이 좋아졌는지 반문한다.
이러한 질문들에 직면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투운동부터 남북관계의 진전까지 모두가 촛불혁명의 큰 흐름에 있으며, 소수자의 존재와 권리가 당연하게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지 않고서는 그 혁명이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촛불혁명은 이미 둑 터진 물살같이 흐르는 중이라 한국사회에 존재해온 많은 적폐들을 밀어내고 있으며, 이는 결코 쉬이 그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단지 성폭력을 고발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성차별과 노동문제, 연령차별 등 구석구석의 문제를 드러내면서 이제는 중고등학생의 참여로까지 이어진 미투운동과 함께, 대한항공 사주 퇴진 운동 역시 주목할 만하다. 재벌 갑질에 대한 폭로로 시작된 이 운동은 한국 재벌들의 상속 문제와 기업운영 행태, 노동문제, 사립대학 운영 실태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연대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문제라 하더라도 자기의 삶에서 성역 없는 싸움을 시작한 이들의 힘이 모일 때 결국 일상 속에 스민 분단의 습속을 일신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우월의 성차별과 기득권의 갑질이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것은 사실 오랜 분단체제의 효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우려되는 것 중 하나가 평화로운 한반도의 번영을 바란다고 하지만 그 번영의 내용이 분단시대의 개발주의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이다. 한반도를 옥죄던 전쟁의 그림자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가 사라지면 남북 모두에서 대중의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변화의 방향이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투기를 앞세우는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태도는 평화를 꾸준히 진척시켜가는 데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분단 너머를 상상하고 기획해나가기 위해서는 미래를 판단하고 좋은 삶을 그릴 수 있는 다른 셈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먼즈’(commons)론이 강조하는 자치적 공공성의 역할이 주목을 요한다. 자치적 공공성 논의는 기존의 공공성 논의와 달리 시장은 물론이요 국가에만 맡겨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사회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추상화된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하며, 이때의 공동체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구성원들 사이에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보장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 커먼즈론의 주장이다. 지금의 남북관계 진전 자체가 자율적인 촛불시민이 바꿔놓은 정치구도에서 가능해졌음을 감안할 때, 분단 상황이 종식되면서 생겨날 분단 너머의 삶, 그 거대한 가능성의 영역 자체를 커먼즈로 볼 필요가 있다.(커먼즈론의 상세한 논의는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특집 ‘커먼즈와 공공성: 공동의 삶을 위하여’ 및 2018년 여름호 특집 ‘문학이라는 커먼즈’ 참조)
이번 여름 우리는 북미정상회담을 비롯하여 한반도 미래에 중차대한 사건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분단체제 극복의 일대 전기가 마련되리라는 기대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차분하게 분단 너머의 삶을 실제적으로 준비할 때다. 분단 너머의 삶이란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가꾸며 뜻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2018.5.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