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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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우리는 다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뒤뚱거리며 살겠지만

안희연

안희연

지난 주말, 샌드위치 연휴를 맞아 모녀 여행을 다녀왔다. 이름하여 wife’s day. 가정, 일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 여성들끼리만 휴가를 즐기자는 취지에서 제정한 가족 행사였다. 아빠 산소에 들러 얼마 전 출간된 새 책을 보여드리고 안부를 전할 목적이기도 했기에 여행지는 강원도로 정했다. 춘천 지나 원주 들러 강릉을 향해서, 집에서 최대한 멀리멀리 우리는 나아갔다. 매일매일, 하루가 한시간처럼 느껴진 걸 보면 이런 시간이 참으로 간절했던 게 틀림없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뭔지 알아? 사랑하는 사람이랑 가는 거래.” 엄마의 싱거운 농담에도 그러네, 맞네, 추임새를 넣어가며 우리는 원없이 다정할 수 있었다. 하기는 아낌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어주는 봄날의 풍경 앞에선 어느 여행자라도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구름 위의 땅’에선 시간이 멈추었다

 

하루는 숲속에서, 하루는 침대에 누워 있어도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방에서 묵으며 하루 열시간씩 잠을 잤다. 특별히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았고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두세시간씩 하릴없이 수다를 떨기도 했다. 참으로 느슨한 여행이었지만 딱 한곳만큼은 꼭 가보자고 고집을 피운 곳이 있다. 구름 위의 땅이라고 불리는 ‘안반데기’라는 곳이었다. 강릉에 여러번 오면서도 늘 차가 없어 미뤄야 했던 위시리스트 중 하나. 자주 안개로 뒤덮인다는 광활한 고랭지 채소밭. 해발고도가 높다는 정도의 정보만 있었지 어느 정도로 가파른 길인지는 알 턱이 없었기에, 그곳을 향해 가는 내내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구불구불한 좁은 산길이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표지판을 보니 안반데기로 가는 고갯길 이름은 ‘닭목령(嶺)’이었다. 얼마나 빼빼한 길이었으면 닭의 모가지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개를 오르는 내내 중장비 차량 한대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추월이 불가한 길이었기에 우리 차 뒤로도 줄줄이 소시지처럼 차들이 이어졌다. 뒤따르는 이는 답답함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랬기에 보게 되는 풍경이 있었다. 나는 초록과 연두의 무한한 스펙트럼에 놀라고, 그것을 섬세하게 배치했을 신의 손길에 감탄하며,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가는 길이 꼭 축축하고 캄캄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상에 거의 다다라서야 길은 열렸다. 내내 비상등을 켜고 식은땀을 흘리며 도착한 초보운전자에게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도 가파른 언덕을 30여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우리는 안반데기 정상에 올라 드넓은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엄마는 몸과 마음이 씻기는 느낌이라 했고 나와 언니는 그 즉시 말을 잃었다. 존 버거의 산문 「삶의 한때」*나 김사인 시인의 시 「풍경의 깊이」**가 잠시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모두 광활한 자연 앞에 선 작디작은 인간이 ‘시간의 영원성’을 감각하는 글들이었다. 산 너머 산 너머 또 산이 있고, 깎아지른 밭 아래 더 가파른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풍경. 시간이 영원히 고여 있을 것만 같은. 그 풍경을 마주하고 서 있으려니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바람 때문에 눈이 매워 그렇다고는 했지만 마음이 무척 놀랐던 것은 사실이다.

 

사슴은 시간의 영혼인 것처럼 달려갔다

 

그간 세상 곳곳을 다니며 아름다운 광경을 많이 보아왔기에 이제는 어떤 장면을 마주해도 방탄조끼를 입은 듯 무감해졌었다. 아름다운 것을 너무 많이 본 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내게 느낄 수 있는 영혼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나를 기쁘고도 두렵게 했다. 그 마음에 대한 보답이라는 듯 저 멀리 사슴 한마리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가는 다리로 성큼성큼 밭을 가로질러 숲으로 뛰어가는 사슴을 보면서, 작은 것에도 쉽게 옹졸해지고 미움으로 출렁이던 내 자신을 멀리멀리 떠나보낼 수 있었다. 인간의 의지로 이룰 수 없는 몫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풍경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각자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었던 것 같다. 안반데기를 뒤로한 채 다시 세상을 향해 내려오는 차 안은 얼마간 고요했지만, 이윽고 “엄마는 이제 눈물이 완전히 말라버렸어” “이런 풍경을 매일 보면 사람이 순해질 것 같아” “자연 앞에 놓이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아니까” 같은 말들을 띄엄띄엄 주고받았다. 시간차를 두고 내려놓은 그 말들이 염주알처럼 하나의 실로 꿰어지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분명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고. 이제 다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등바등 뒤뚱거리며 살아가겠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고.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 초록이 가장 무성하고 환한 시간, 우리의 짧은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삶은 계속 이어졌다. 멈춘 적도, 다시 시작된 적도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이 이리저리 휘돌고 있었다. 산들은 더욱 높아지고 나무와 들녘은 이만치 가까이 다가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니 그보다는, 모든 사물들이, 내 존재가 무화(無化)해 버린 그 자리를 향해 모여 들었다는 편이 낫겠다.”(「삶의 한때」 부분,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열화당 2004)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백년이나 이백년쯤/아니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풍경의 깊이」 부분,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안희연 / 시인

2018.5.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