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역사와 평화교육: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
역사 교과서에 대한 오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와 관련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국정’이 아닌 ‘검정’ 체제하에서 발간한 현 교과서들이 매우 친북적이거나 좌파적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대부분의 보수언론들과 일부 지식인들(흔히 ‘뉴라이트’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기존 역사 교과서의 한국근현대사 서술이 너무 친북·좌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처음에는 소위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의 채택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나중에는 시대역행적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세밀히 들여다보면 위와 같은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정치적 모략에 가까운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미 몇몇 학술논문들이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의 검정 시스템을 통과한 현 교과서들은 소위 ‘친북·좌파적’이라는 수식어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교과서들은 당시 교육부에 의해 제시된 집필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현대사 서술에서 전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최소한 중도적인 역사용어와 구성체계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특히 기존 검정 교과서들의 북한 관련 서술은 시종일관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일면 공격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고등학교 『한국사』 8종 교과서의 현대 북한사회 관련 서술은 전체 교과서 약 400면 중에서 4~6면(1%)만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조차도 ‘독재체제’ ‘3대 세습’ ‘경제침체’ ‘국제적 고립’ ‘열악한 인권’ 등과 같은 내용과 구성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남북교류와 관련된 서술도 있지만, 대부분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핵무기 개발 등을 강조하면서 북한에 그 파탄의 책임을 묻고 있다. 또한 과거 북한사회를 아주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내용들(토지개혁, 친일파 청산 등)은 박근혜정부의 ‘수정·보완 방침’(2013.9.11)에 의해 가차없이 수정·삭제되었다.
역사 교사들의 딜레마
위와 같은 상황은 현직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목 교사들에게 적잖은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당장 한국현대사 관련 수업에서 북한과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다소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일련의 한반도 평화 정세 속에서 북한은 무조건적으로 격멸하거나 반대해야만 하는 적(敵)이 아니라, 미래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만 하는 협력자이자 동반자적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반면에 새로운 검정 시스템하에서 집필될 새로운 역사 교과서는 아무리 빨라도 2020년에 이르러서야 일선 교육현장에 배포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해, 우리 학생들이 현시대의 한반도 평화 정세와는 꽤나 동떨어진 내용의 역사 교과서를 최소한 2020년까지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얼마 전 일군의 역사 교사들과 이같은 문제들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현재의 역사 교과서에 대해 다양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지금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평화’의 문제의식을 무시한 채 표현 그대로 교과서 위주의 교육을 진행해야 하는지, 아니면 교과서 내용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평화적 사고를 학생들과 자유롭게 공유해도 괜찮은지 매우 난감해하고 있었다. 교사 입장에서 교과서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과서대로만 가르칠 수도 없는 난감한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다. 교사들은 이같은 자신의 딜레마의 연장선상에서, 최소한 현재 진행 중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교육과정’ 개편 과정에서라도 ‘한국현대사’의 비중이 이전보다 훨씬 커지고, ‘평화’의 문제의식이 더욱 중요하게 반영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역사적 평화교육의 필요성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 진행된 교육감선거에서는 위와 같은 교사들의 소망과 딜레마를 다소나마 해결해줄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재선 또는 삼선에 성공한 서울시·경기도·강원도의 접경지역 교육감들이 ‘평화통일교육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통일 관련 단체들과 정책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해당 선언에는 평화통일교육 프로그램 개발, 남북 교육교류부서 신설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은 “지난 2016년부터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시민』 교과서를 개발, 작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적용 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는데, 이 같은 평화·통일 교과서의 보다 적극적인 활용은 현 교과서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과거에 우리처럼 민족분단의 고통을 겪었던 서독의 경우, 이미 1970~80년대부터 역사교육에서 ‘평화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서독의 역사교육에서 ‘평화’를 핵심적 가치로 적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진보와 보수의 정쟁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전쟁은 단순한 정치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재앙임을 이해시키고,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며, 전쟁영웅 대신 평화영웅을 부각시키는 것은 독일 역사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역사평화교육을 통해 함양된 평화감수성은 응당 어떤 형태로든 독일의 통일과 평화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역사의 뮤즈 클리오(Clio)는 ‘찬양자’(glorifier)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전쟁은 필연적이고,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경구가 보편적이었던 과거 사회에서는 전쟁영웅들이 클리오의 찬양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총력전과 핵무기의 파괴력을 경험한 현대 인간사회에서 전쟁영웅은 더이상 클리오의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 틀림없다. 대규모 전쟁의 발발은 곧 인류라는 종(種)의 소멸을 뜻할 수도 있다. 때문에 오늘날의 클리오는 새로운 평화영웅들과 평화를 향한 시도들에 주목하면서 인간사회에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
김태우 / 한국외대 한국학과 교수
2018.6.2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