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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미래에 등을 바치다: 다와다 요코 『헌등사』

헌등사 100타와다 요오꼬(多和田葉子)라는 이름을 듣자 마치 용수철처럼 튕겨나가게 하는 스위치라도 누른 듯, 한 20년 전으로 풀쩍 날아갔다. 이제는 색 바랜 기억이지만, 타와다 요오꼬는 한때 내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였다. 주로는 ‘이중언어’ 작가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즐겨 훑어보던 비평가들의 글에도 자주 이름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예전에 묵혀둔 물음을 떠올리고 약소하게나마 답을 찾아보겠다고 이 작품집을 손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책장에는 언젠가 일본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른 타와다 요오꼬의 『눈의 연습생(雪の練習生)』이 얌전하게 꽂혀 있다. 의인화한 북극곰 삼대가 펼치는 서사라는 별난 설정과 이 작가의 ‘최고 걸작’이라는 선전 어구에 힘입어 주저 없이 책값을 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끝까지 읽어내지는 못했다. 웬만큼 재미가 없더라도 완독하는 버릇이 있는 편이라 이런 일은 좀 드문데, 해독(解讀)하는 과정에 걸림돌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헌등사』(남상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8)를 읽으면서 그때가 떠올랐다. 미래의 독자에게 미리 언질을 주자면 쓱쓱 읽히는 소설이 아니다. 촘촘하게 박혀 있는 언어와 사건의 곡예에 제대로 올라타려면 두뇌를 제법 가동해야 한다. 이 책을 집어 들고, 구입하고, 펼치고, 읽어 내려가는 사람은 소수일 확률이 높다. 어지간한 문학 애호가라고나 할까? 이런 작품은 이른바 비평가라는 인간들이 선호하기 마련이다. 큰 그림의 이해에는 별 어려움이 없지만 디테일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에 신체적으로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무메이가 등장하고, 다음 페이지에는 조깅용 개를 빌려 제방 위를 달리는 요시로가 등장한다. 이 대조적인 두 사람이 표제작 「헌등사」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타다미 8첩 방, 부엌, 폭 2미터의 마룻바닥이 있는 가설 주택에 산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그 지역 이재민에게 제공한 가설 주택이 떠오르는 집이다.

 

음, 사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소설의 모든 요소는 일본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광맥을 터뜨리는 뇌관으로 보일 정도로 함의가 풍부하다. 60대에 오끼나와로 이주한 조모 아마나(2대)와, 예술을 싫어하고 책을 읽지 않는 무정부적 성향의 부친 도모(3대)를 건너뛰고, 108번째 생일을 맞은 증조부 요시로와 초등학생 증손자 무메이로 이루어진 기묘한 가정…… 100년에 이르는 나이 차이보다 더 기묘한 점은 팔팔한 증조부와 음식 삼키는 것도 힘든 증손자가 드러내는 자연의 도착(倒錯)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60대 젊은이가 정년퇴직하는 시대가 있었던 것이 신기하다”(22면)고 여기는 시대를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헌등사」의 세계와 엮이자마자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로 휙 끌려들어간다. 바로 3.11이라는 대재앙 이후 스스로 무너뜨린 세계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사회의 모습이 그것이다. 타와다 요오꼬는 그것을 쇄국과 통제와 결핍으로 상상한다.

 

“외국 도시의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기묘한 법률”(45면)이 존재하는 것을 비롯해 통상적인 검열이 만연하고, 70대 후반의 ‘젊은 노인’이나 90대 ‘중년 노인’이라는 말이 정착할 정도로 극심한 노령사회에 진입했으며, 해외 교류가 전적으로 막힌 탓에 오렌지 한개를 만엔으로 지정해놓을 만큼 과일이 부족하고, “건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들이 없어진 세상에 소아과 의사들은 노동시간이 늘어났고”(32면),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라 “신장을 측정하는 의식은 폐지”되었으며(149면), 영어 학습의 금지로 영어를 모르는 세대가 탄생했다는 것 등등이다.

 

핵과 환경오염과 이상기후라는 ‘지(知)의 실패’를 떠안고 처절하게 댓가를 치르는 삶, 이 세기말적 현실을 인류는 어떻게 짊어지고 나아갈 것인가? 앙버티며 겨우 살아남는 인간 ‘이후’의 삶에 과연 희망은 있을 것인가? 참으로 무겁고 버거운 숙제다.

 

‘시대폐색’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근미래 일본사회의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타와다 요오꼬가 우리 손에 쥐여준 것은 ‘헌등사(獻燈使)’라는 존재다. 사전적으로 ‘헌등사’(한글 제목만 보고 ‘절’ 이름으로 오해했다)는 신이나 부처에게 등을 바치는 소임을 맡은 사람이겠지만, 이 작품에서 ‘헌등사’로 선택받은 무메이가 갈 곳은 국제의학연구소가 있는 인도의 마드라스라고 되어 있다. 무메이는 그곳에 건강 상태에 관한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세계에 기여한다고 하니, 무메이라는 존재가 곧 등불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자체는 그야말로 ‘문학적’ 상징이자 또다른 물음일지도 모른다.

 

다만 삐뚤어진 독후감일지 모르겠지만, 아무 죄 없이 피폭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름 없는 무메이(無名)가 ‘헌등사’의 재목으로 담임교사 요니타니 눈에 띈다는 설정에서 좀 정답 냄새를 풍긴다고 느꼈다. 건전함을 내세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무메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음, 과연 부계와 모계의 균형을 바로잡는 겐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는데, 뒷장이 백지라서 마치 발을 헛디딘 듯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끝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이 작품의 매력이자 골치 아픈 점인데, 문득문득 ‘일본어를 알아야 이 소설을 잘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조깅이란 말이 사라지고 도피(駆け落ち)로 바뀌었다는 말이 나오고(10면), ‘도피’와 ‘연애’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말이 넌지시 나온다. 駆け落ち에는 ‘눈 맞은 남녀의 도피’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문맥적 의미가 또렷해진다. 또 “덴구사는 이와테현에 본사가 있어 구두 안에 ‘이와테까지’라고 붓으로 쓰여 있다. 이 ‘까지’는 영어를 배우지 않게 된 세대가 ‘made in Japan’의 ‘made’를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 생긴 표현이었다”(12면)는 문장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made’에서 ‘까지’를 나타내는 조사 ‘마데(まで)’를 연상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드는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물론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도 많았으리라. 한마디로 언어의 지뢰가 곳곳에 깔려 있는 작품이다. 덧붙여 ‘이중언어 작가’라든지 ‘여성 이민 작가’라는 이름표를 통해 번역의 본질에 대한 문제의식도 싹텄다. 번역 과정을 통과한 이중언어적 특질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 작품의 번역에는 유달리 노고가 많았을 것 같다. 단적으로 번역 자체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나 역시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왠지 숙연해졌다. 원문을 제시하고 왜 이같이 번역했는지를 설명한 다음, “위와 같이 번역했음을 양해해주길 바란다”(204면)라고 끝맺은 것을 보고, 잠시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서평이란 본래 남의 책을 읽어보라고 소개하고 권유하는 글이다. 하지만 올여름에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최고치를 경신한 역사적인 무더위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자칫 두뇌의 과다 회전으로 어지럼증에 시달릴까 염려스럽다. 가을이라는 유토피아적 근미래를 기다리자. 나도 그때가 되면 『눈의 연습생』을 꺼내 다시 읽어볼까 한다.

 

김경원 / 번역가, 국문학 박사

2018.7.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