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재판의 독립과 재판에 전념하는 법관
법원행정처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발생한 ‘사법농단’ 사건의 문건들을 추가로 공개했다. 그런데 사법농단은 사법 영역에서 부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두루뭉술한 단어다. 좀더 나누어보면 이렇다.
‘재판거래 또는 재판개입’이 있었다. 상고법원 같은, 사법부 고위층이 선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 청와대와 국회의 의중에 재판 절차나 결과를 맞추려 했거나 맞추었다. 재판‘거래’를 위해 재판‘개입’이 있었다고 볼 정황이 너무나 명백해지고 있다. 물론 재판 관련 규정을 바꾸어 재판절차에 손쉽게 끼어드는 방식도 시도되었다. 추가 공개된 문건 중에는, ‘청와대가 원하는 특정 유형 사건을 필수적으로 대법원 심판 사건으로 추가’하는 방안이 거론되어 있다.
다음으로 ‘배제와 압력’이 있었다. 상고법원 이슈를 포함하여 사법부 고위층의 의도대로 따라오지 않는 법관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작전을 벌였다. 배제와 압력의 대상은 사법부 외부로까지 확대되었다. 민변이나 대한변협 회장 등 의견이 다른 그룹들이 법원행정처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하는 대법관 증원론을 대한변협이 채택하자 변협 회장의 사건수임 내역을 뒷조사하거나 대한변협이 주관하는 법률가대회에 사법부가 불참하는 방안을 만지작거렸다.
다 같은 ‘독립’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을까보다는 무엇을 생각하지 않았을까를 들여다보자.
‘재판의 독립’은 법관이 양심에 따라 재판하도록 맡겨야 하고 누구도 부당하게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건을 어느 법관에게 맡길 것인지도 포함된다. 이런 재판의 독립은 사법부 외부뿐 아니라 사법부 내부에서의 간섭까지 경계한다. 반면 ‘사법부의 독립’은 대외적 관계에서 사법부라는 조직을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법원 내부의 간섭과 침해는 중요하지 않다.
양승태 대법원장과 그가 관할하던 법원행정처 소속 법관들은 ‘사법부의 독립’을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재판의 독립’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 역시, 이 둘을 구별하지 않았던 게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듯싶다.
로비스트가 되어버린 법관들
방향을 바꾸어 사법농단 사건은 누가 범한 일인가를 생각해보자. 일반 공무원이 아니라 ‘법관들’이 범한 일이다. 대체 어떻게 법관이 저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국민들은 법관을 재판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부이지만 법관들이 로비스트가 된다. 한겨레 강희철 기자가 올해 6월에 쓴 글(한겨레 2018.6.4)의 한 부분이다.
“대법원은 입법 파트너로 국회를 선택했다. 7~8월께부터 양 원장의 ‘돌격대’로 나선 법원행정처의 입법 로비가 본격화했다. 행정처 고위층이 직접 나서서 주요 정당 대표·원내대표와 회동하고, 소속 판사들은 입법 영향력이 있는 국회의원과 그 보좌진까지 분담해 개별 접촉과 설득에 매달렸다.
<그 무렵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판사님이 고교 동문이라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공부 잘했다고 소문난 선배라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뜻밖이었다. 밥을 사겠다고 해서 만났더니 상고법원과 관련한 의원님 생각 등을 묻더라.> (전직 의원 비서관)
행정처 고위 인사가 한밤중에 주요 상임위원장이던 한 국회의원의 호출을 받아, 자기 차로 만취한 그 의원을 집까지 손수 ‘배달’했다는 소문이 법조계에 파다했던 것도 이 무렵이다. 사법부가 이익단체의 하나로 ‘전락’한 셈이다.”
그에 앞서 필자는 작년 8월말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행정 업무는 개개인의 독립과 양심, 자유로운 토론 등 법관에게 필요한 자질들이 필요한 업무가 아니라 일사불란한 집행이 필요한 영역이다. 일반 공무원들이 부서장의 지휘를 받듯이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법관들도 각 부서의 위계구조에 따라 상급자의 지휘를 받는다. 법원행정처의 심의관은 실장의 지휘를, 실장은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휘를, 이들 모두는 법원행정처장의 지휘를 따라야 한다. 이들 모두는 종국적으로 법관 인사권을 쥔 대법원장의 지휘를 받는다. 법관 블랙리스트도 그런 지휘체계에 따라 만들고 관리돼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에는 입법과 예산 확보를 위해 국회의원들과 접촉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예산을 따내야 하고 입법 통과나 저지를 위해 정치인과 접촉해야 하고 그들과 친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로비스트가 되어야 한다.”
로비스트가 되어야 하는 법관. 우리 사회가 기대한 법관의 모습은 아니다.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한 그들은 ‘법관’이 아니라 그저 사법부에 소속된 ‘공무원’, 아니 ‘직장인’에 불과했다. 그 자리가 출세를 위한 발판이 되는 곳이었다. 인사권을 쥐고 있거나 영향을 끼치는 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 그들이 바라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자리였다.
사법농단이 가능했던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법농단은 사법부 내부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 벌인 일이다. 그래서 더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법관들이 로비스트가 되지 않게끔 해야 한다. 법원행정처에 법관들이 근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사법행정권은 재판의 독립을 방해하는 잠재적 요인이다. 따라서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특정인이나 몇몇 인사에게 집중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법관대표자회의나 개별 법원의 판사회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법원장의 지위와 역할, 선임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각 법원의 법관들이 호선으로 선임하면 된다. 위계서열구조의 중간 정점이 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이런 개혁들은 법관들이 재판에만 전념할 수 있게끔 할 것이다.
‘재판의 독립’과 ‘재판에 집중하는 법관’. 사법농단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박근용 / 참여연대 집행위원
2018.8.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