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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선생에게: 고 황현산 선생을 기리며

함돈균

함돈균

당신이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여행 중이었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최근 생긴 땅이라는 화산지대 검붉은 불기운을 바다 위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하늘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뿜은 채, 바다에는 시뻘건 용암이 천천히 흘러내리며 최초의 검은 땅을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속을 헤아릴 수 없으며, 범접할 수 없는 깊고 뜨겁고 형체를 갖추지 못한 검은 것이, 지금 인간의 시야로 확인하거나 측정할 길 없는 아득한 시간의 광야를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현산(鉉産). ‘밤’이 아무것도 없는 허방이나 무서운 어떤 것이 아니라, 헤아릴 길 없는 깊이를 지닌 시간, 만상을 낳고 기르며 운행하는 우주적 심연이라는 걸 알려준 선생. ‘밤이 선생이다’(동명의 저서, 2016)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당신은, 밤에 이름을 붙인 선생. 저는 당신 이름 ‘현(鉉)’ 자를, 검을 현(玄) 자에 소중함[金]을 부여한 밤의 작명자로 새깁니다. 당신 이름 ‘현산’은 그리하여 ‘귀한 검은 것이 낳는다’라는 오묘한 뜻이 되지요. 그렇다면 ‘밤이 선생이다’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읽고 쓰고 풀이하고 번역하고 가르치며 살다간 당신 자신에 대한 풀이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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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죽음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개별성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희귀하지만 어떤 경우 한 죽음은 더 큰 삶의 계기로, 개별성을 떠나 보편적인 정신으로,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역사의 예감이 되기도 합니다. 당신은 현대 지성사에서 현대 한국어 문장으로 가장 깊고 아름다우며 높고 멀리까지 가는 글을 짓는 작가 중 한분이었습니다. 작가들의 글에 깃든 두루 통하는 참뜻을 헤아려 해석하여 전달해주는 비평가로서도, 한 문화의 총체적 역량이 담긴 외국어를 다른 언어현실에 닿게 하여 그 언어현실의 새로운 사유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번역가로서도, 당신이 자신의 문장을 제 안에서 길어 올려 ‘말년의 양식’으로 에세이스트가 될 때에도 이 평가는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작가적 정체성을 가질 경우에라도 역사의 가능성, 역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초월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실존의 특수성을 보편의 역사로 읽어내는 해석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개별적 개인을 인류의 이상에 거주하게 하는 글읽기와 글짓기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당신은 과거를 답습하지 않으며, 늘 미래에 사는 방법으로 글을 읽고 짓고 가르쳤으며, 그런 태도로 성의를 다하여 많은 이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했습니다. 그 대화의 대상 중에는 아직 인류의 시간에 출현하지 않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도 있습니다. 당신은 글을 읽고 짓고 대화하는 도처에서 모두에게 ‘선생’이었습니다.

 

제가 비평가로서 황현산을 기억하게 된 글 중에 이육사의 「광야」에 관한 비평이 있습니다. 우주에 지구라는, 또는 한반도일 수도 있는 원시의 땅이 열리는 순간을 묘사하며 작가 이육사가 쓴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애매한 문장을, 당신은 과거의 닭소리가 아니라 ‘천고의 뒤’ 미래에 완성되어야 할 문장으로 읽습니다. 진정한 천지창조는 자연의 태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고의 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노래의 씨를 뿌리는’ 수고로운 노동과 기투를 통해서 완성될 인류의 협력적 과제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글에서 사람은 인간중심주의에 오만하게 기거하지도 않고, 초자연적 신비주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우주적 섭리를 이해하고 자연과 합심하여 그 섭리를 역사 안에 계시하고 완결해야 할 소명의 당사자가 됩니다. 역사는 늘 완성되어야 할 장기과제이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얼굴 없는 희망이며,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한 변방이지만 그 변방이 세상의 중심 터전으로 참여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제 참된 모습을 갖추는 해방구입니다. 존재가 공평하게 제 몫을 갖고 사물들이 적절하게 제자리를 찾아 평등하게 대화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로운 시간이며 민주적 전망이 계시되는 현실, 개벽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초현실’은 ‘현실’이 됩니다.

 

당신은 시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이 희망, 어쩌면 누릴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전망을 기억하는 가장 끈질기고 아름다우며 타협 없는 기도임을 우리에게 깨우쳐주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그 얼굴 없는 희망의 문장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번역가로서 우리말의 현실로 드러나게 하려고 일생을 투신했던 외국시들이, 세간의 오해와 몰이해를 무릅쓰고 당신이 온힘을 다해 옹호하고 온전한 자리를 부여하려고 했던 한국시들이, 시의 희망과 역사의 전망은 다른 것이 아니며, 더 큰 보편적 진리가 깃들고 드러나는 동일한 기도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아직 낮이 되지 않은 밤, 언젠가는 빛으로 전환될 궁극적 어둠이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잠깐 드러나는 거룩한 표면 같은 것이지요. 그 궁극성에 닿은 비평가나 번역가, 그에 버금가는 투철한 역사가가 아니라면 알아보고 전달해주기 어려운 심연을 지닌 밤의 표면.

 

현산. 밤의 선생, 밤에 이름을 붙인 작가. “꽃은 허공에 핀다”라는 당신의 문장을 기억합니다. 내 눈에 선명하나,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그 현실은 사라집니다. 아무에게도 내가 본 것을 설득할 수 없지만, 그 허공을 본 자는 결코 그 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시는, 문학은, 그 꽃을 미리 본 자의 증언이고 노래이며 기도입니다. 그것은 진보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진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미리 당겨, 불행한 현실에서 이미 미래의 자유로운 자로 행복하게 사는 명랑한 실천이라는 당신의 문장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문장이 꽃을 본 자의 시이고, 굴복하지 않는 명랑한 진보주의자의 용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밤의 선생은 그 문장의 씨를 제 안에 받아쓰는 작가들에게, 그 문장의 거룩한 정신을 현실로 싹틔워내려는 이들에게 항상 미래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함돈균 / 문학평론가

2018.8.22. ⓒ 창비주간논평

사진 ⓒ 스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