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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김정연 『혼자를 기르는 법』

혼자를기르는법_12_120이렇다 할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김정연의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전 2권, 창비 2017~18)을 읽으면서 막냇동생을 떠올렸다. ‘청년인턴제’로 한 중소기업에 들어간 동생은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수면부족과 멀미 때문에 아침을 먹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힘들여 번 돈은 생각보다 적어서 사회초년생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물건을 사고 나면 별로 남는 것이 없었고, 그나마도 갑자기 얼굴 전체에 심하게 번진 여드름을 치료하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 성인 여드름의 원인 중 가장 흔한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이 녹록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퇴근 후에 동생은 그냥 쓰러져 자거나, 가끔씩 「김과장」이나 「막돼먹은 영애씨」 「라이브」 같은 현실 직장의 모습을 담은 드라마를 즐겼는데, 공감할 만한 내용이 많았는지 TV를 보다 훌쩍거리기도 했다. 동생은 그토록 기다리던 주말 이틀을 반려견 요미를 껴안고 빈둥거리거나, ‘심즈’라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 무한루프 게임을 하며 시시하게 보냈다.

 

『혼자를 기르는 법』의 주인공인 ‘이시다’의 삶은 동생의 일상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을 안고 상경한 시다는 고단한 서울살이를 견디며 ‘산다’는 것의 처절함을 온몸으로 느낀다. 작은 인테리어 회사의 ‘막내’ 사원인 그는 가장 적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늦은 밤까지 부서의 모든 잔심부름을 도맡아 한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위험하며,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고시원과 원룸을 전전하는 사이에 꿈은 흐릿해져만 간다. ‘혼자를 기르는 법’이라는 이 심오한 제목은 존재의 실존과 생존이라는 두가지 문제를 동시에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를테면, 월급을 일급으로 쪼개 내가 얼마짜리 가치를 지닌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다시 이 돈으로 한달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셈해야 하는 그야말로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시다의 현실은 이 시대의 암울한 청년문제를 함의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사회적이다. 청년 일자리 문제, 청년 주거 문제, 청년 저임금 문제 등등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이미 비관적 상투어가 된 지 오래다. 이른바 ‘N포세대’라고 불리는 청년세대는 미래의 기반을 다질 새도 없이 무엇을 먼저 포기해야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만화 속에서 시다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집에 대한 사유는 청년 가구가 처한 주거 빈곤의 실상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시다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 새롭게 단장한 고급 주택은 시다의 원룸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늘 ‘매우 열심’인 시다는 왜 이제 겨우 고시원을 벗어났을 뿐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양질의 일자리를 꿈꿀 수 없는 청년들은 저임금 노동을 감수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착취의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내가 바로 이시다이시다’라는 1화의 제목은 생활의 무게에 억눌린 존재의 존엄성을 상기시킨다. 시다의 아버지는 딸이 높고 귀한 사람이 되어 존경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시다’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회사에서 막내인 시다는 그저 ‘시다바리’(보조원)에 불과하다. 직장이라는 공간 내에서 막내란, 잡무로 상징되는 모든 불합리를 감내해야 하는 인내의 아이콘일 뿐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하기 싫은 하찮은 업무의 반복은 자기비하로 이어지기 쉽다. 시다가 자기 자신을 ‘태초의 무한’이 허공으로 튕긴 코딱지의 아주 작은 병균의, 병균의, 병균에 비유한 것은 “타고난 무산자”(1권 171면)의 초라하고 서글픈 자기인식을 나타낸다. 이 지점에서 ‘먹고사니즘’이라는 생존의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실존의 문제와 맞닿게 된다. 그러니까 이 만화는 살아가는 것과 살아남는 것, 즉 ‘~이시다’와 ‘시다(바리)’의 사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우리 삶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만화 속에서 꽤 자세하게 묘사되는 시다와 혜수의 취미생활은 ‘하찮음’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이들은 햄스터나 도마뱀, 수중식물과 물고기, 각종 곤충에 이르기까지 얼핏 보기에 무용한 미물들에게 애정을 쏟는다. 시다는 겨우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햄스터 윤발이를 기르는데, 윤발이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가령 윤발이가 쥐답게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싸기 위한 화장실, 놀기 위한 쳇바퀴, 자기 위한 은신처, 먹기 위한 밥그릇, 마시기 위한 급수기”(1권 81면)가 필요하며, 이외에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넓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야행성인 윤발이는 밤이 되면 생의 오롯한 주체로서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해낸다. “‘얘도 뭔 생각이 있겠지’라고 생각해버리는 그 순간부터, 뭔가를 기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워”(1권 93면)진다는 시다의 독백은 의식주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실존의 무게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시다는 윤발이의 우주가 됨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지닌 절대성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다.

 

웅크린 형상의 시다는 먹고사느라 점점 작아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한다. 자신의 시간이 쓸모없는 똥(같은 것)으로 가득 찰까봐,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을까봐, 내가 무엇을 바라는 사람이었는가를 잊어버리게 될까봐, 늘 두렵고 초초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생존과 실존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를 돌보는 법은 무엇일까. 그 답은 이 만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MyHome.skp’라는 파일명을 통해 암시된다. ‘MyHome.skp’는 아직 작업 중인 스케치업 파일로, 이것은 시다가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오늘로 다시 돌아와야 했던 이유”(2권 524면)이기도 하다. 완성된 마이 홈에서 집들이를 하는 즐거운 상상으로 마무리되는 이 만화의 결말은 우리 각자가 내면에 고이 간직해둔 “여길 지나, 가고 싶은 곳”(같은 면)을 기억하게 한다. 시다가 입에 달고 사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의 반어적 표현일 것이다. 존재의 무거움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퍽 고단하다. 그것은 스스로 가벼워지는 일인 동시에 무거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삶이란 원래 조금은 무거운 것인 것을.

 

박윤영 / 문학평론가

2018.9.1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