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11년 만의 민족공동행사가 남긴 숙제
지난 10월 4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 11주년 기념 민족공동행사에 남측 방문단의 일원으로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이번 행사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10·4선언에 합의한 이후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첫 기념행사였다. 11년 전, 6·15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6·15공동위원회)가 주최하는 민족통일대회의 실무자로 평양을 방문했던 필자로서는 감회가 남다른 여정이었다.
10·4선언을 위한 11년 전 ‘민간’의 노력들
2007년 6월, 남북관계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 북한자금에 대한 금융제재를 강행하고, 이에 반발한 북한이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실시하면서 위태로워진 상황이었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2007년 초 6자회담 2·13합의로 가까스로 제 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임기 말을 앞둔 노무현정부는 북의 최고위급과 한반도의 운명을 두고 담판을 벌일 기회와 시간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당시 6·15공동위원회, 특히 남측위원회는 남북 당국 간 관계의 전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초정파적 민간협력의 모범사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방북했다. 백낙청 상임대표의 연설문 한 문장, 우리 대표단의 건배사 한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모든 연설문도 반드시 남북 상호가 사전 검토해 행여 어느 한쪽에서라도 논란이 나오지 않게 했다. 심지어는 본 행사 주빈석에 야당(당시 한나라당) 의원 좌석배치를 갑자기 바꾼 북측에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본 행사일정을 이틀간 연기하기도 했다. 초정파적 교류협력의 정신을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10·4선언이 도출되기까지 투여된 숱한 땀과 노력, 지난한 협상과정에는 당국의 노력 못지않게 민간의 숨은 역할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에 대한 백낙청 당시 상임대표의 확고한 비전과, 남북한 주민들의 눈높이에 맞게 공동행사를 성사시키려는 집행부의 각별한 노력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일상화되어가는 남북 간 교류와 협력
하지만 노력한 보람도 없이 지난 10여년간 남북관계는 단절된 채 악화일로를 걸었고, 6·15선언과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항들의 실천 역시 전면 중단됐다. 민간 주체들의 최소한의 교류와 협력마저도 대부분 차단됐다. 6·15남측위원회의 활동도 큰 제약을 받았다. 이 상황을 뒤바꾼 것은 지난 2016년 겨울 일어난 촛불혁명과 그 결과로 이루어진 정권교체였다. 그후 판문점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은 “한반도에 더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천명”했다.
4·27판문점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 협력과 교류는 일상화되고 있다. 이번 10·4선언 11주년 기념 민족공동행사는 새롭게 열린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 시대에 남과 북의 당국과 민간이 과연 어떻게 관계 맺고 협력할지를 모색하는 시금석 같은 행사였다. 이 여정에 참여하면서 보고 느낀 개인적인 소회와 더불어 이번 공동행사를 통해 확인되는 4·27, 9·19시대 남북 민간교류와 민관협치의 몇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과 시사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변화하는 북한, 이제 ‘시민참여형’ 민관협치가 중요하다
우선 이번 공동행사는 민간이 주도하고 가교역할을 했던 과거와 달리, 정당, 지방자치단체, 각계각층 민간이 함께 참여하고 당국이 주도하는 합동행사의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미 당국관계가 상당한 폭으로 진전되어 관계개선의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이해된다. 국면의 특징상 민간의 주도적 역할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남북관계가 일상화되는 조건에서 민관협치의 중요성이 커지고, 협동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고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새롭게 대두되는 과제는 새로운 조건에 맞게 공동행사에 참여하는 민간주체의 구성과 역할을 다변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번 방북단의 일원으로 통일국민협약 등 남북관계에 관한 사회적 대화와 합의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보수단체 대표들을 포함해, 과거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사들도 일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전이라 하겠다.
둘째, 북측의 태도가 과거와 달리 여러면에서 한결 여유롭고 융통성 있게 변하고 있음이 관측됐다. 그것은 남북관계의 개선으로만 설명하기 힘들고, 지난 10여년간 크게 발전한 북한 상황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2007년과 달리, 평양에는 여명거리를 비롯한 곳곳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섰고 각종 매대나 가게들이 크게 늘어났다. 전기공급도 한층 나아진 듯 보였고 무엇보다 핸드폰 사용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주민들의 옷매무새와 얼굴표정이 훨씬 여유있고 다채로워진 것은 물론이다. 이번 행사 과정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북측 주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의 하나였다. 예를 들어 동물원과 자연사박물관 견학 중에는 남측과 해외 방문자들이 시설을 관람하는 동안 북측 주민의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다. 남북공동행사가 소수의 엄격히 조율된 상징의식의 수준을 넘어설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라 하겠다.
셋째, 당연한 일이지만 남북공동행사의 준거점과 의제가 좀더 다양해졌고 남북 간 공유의 폭 역시 넓어진 것을 확인했다. 남북 간 최고위층의 합의에 평화체제와 비핵화,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축 등이 포괄적으로 포함됨에 따라 민간 차원의 의제설정과 주장에서 긴장과 금기가 상당히 완화됐다. 한편 11년 전에는 6·15선언이 거의 유일한 남북정상 간 합의문서였고 ‘남과 북에 다같이 의의있는 날’ 역시 6·15 혹은 8·15 정도였다면, 이번 공동행사에서는 4·27판문점 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이 하나의 기준문서로 인용되거나 거론됐다. 앞으로 공동행사를 벌일 만한 ‘의의있는 날’에 4·27, 9·19를 포함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됐다. 이는 민족공동행사의 의제설정과 조직화 과정을 도맡아왔던 6·15공동위원회의 역할 역시 재조정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준다.
폭넓은 민간 주체가 참여하는 실질적 협치 구조가 필요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이번 공동행사는 9·19선언 직후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급하게 치러졌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형식과 내용 면에서 지나치게 요식적이고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민족통일대회에서 채택한 호소문의 내용은 양 정상의 선언과 합의를 추인하고 그 순조로운 이행의 결의를 재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참가단 구성에서 노무현재단 측 인사의 참여비중이 과도하게 높았고, 각계각층 인사의 참여는 제한됐다. 해외 측 참석 인사의 구성 역시 지나치게 북측에 가까운 인사들로 편중되어 있었다. 부문 간 상봉행사는 1시간 내외로 매우 짧았고 그 구성 역시 단조로웠다. 4·27판문점선언의 결과로 남북연락사무소가 개성에 설치되어 일상적인 민간교류협력의 창구로 기능하는 상황에서 민족공동행사를 사실상 유일한 접촉 창구로 삼는 현재의 방식은 지속 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정부, 정당(국회), 지자체, 사회단체가 좀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민족공동행사의 내용과 형식을 크게 바꾸지 않을 경우 이번처럼 요식행사로 굳어질 우려가 크다.
이번 공동행사는 남북관계가 일상화되고 제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정부와 국회, 지자체와 시민사회가 어떻게 협력해나가야 할지 모색하는 첫 실험이었다. 공동행사라는 형식이 지닌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갈등 완화와 평화정착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남북 민관협치 활동으로 이해하고, 민간 스스로 고도의 인내심과 목적의식을 발휘해 의제와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장해나갈 필요가 있다. 다만, 공동행사 추진기구 자체의 강화를 꾀하거나 더 높은 수준의 연합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폭넓고 다양한 이들이 모여 비록 고르지 않더라도 다채로운 의견을 나누고 표출하도록 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또한 사전 준비나 운영에서 당국만이 아니라 민간 주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협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도 숙제라 하겠다.
이태호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2018.10.1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