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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풀을 즐겨 먹습니다만,

박소란

박소란

채식을 주제로 글을 쓰려니 어쩐지 좀 쑥스럽다. 나는 채식주의자인가. 소, 돼지, 닭 같은 육류를 먹지는 않지만 생선, 해산물은 먹는데. 우유와 계란도 조금 먹고. (비건이 아니라 페스코.) 나는 채식‘주의자’인가. 스스로 채식을 택했지만 그것을 내세워 주장하는 ‘-주의자’는 아닌데. 확신을 요하는 어떤 순간이 올 때마다 자주 망설이곤 하는데. 채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면, 보다 완고한 진짜 채식주의자가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속으로 생각한다. 그에 비해 나는 얼마나 헐렁한가. 신념을 갖기에 얼마나 빈틈투성이인가. 그러니 다만 취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취향이 몰고 온 의아한 일들에 대해 잠시 토로해보기로.

 

이제 막 5년 차에 접어든 소심한 채식(주의)자인 나는 무엇보다 아직 채식(주의)자임을 커밍아웃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채식(주의)자다. 커밍아웃을 해도 좋은가, 괜찮은가 매번 고민에 빠진다. 시시로 마주치는 낯선 이들에게 유난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게 두려우니까. 심지어 김밥 한줄을 살 때도 “햄은 빼주세요” 말할 타이밍을 두고 망설인다. 채식을 한다고 하기보다 그냥 편식이 심하다고 둘러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기를 먹지 않아요” 이후, 미처 생각지 못한 각양의 반응을 맞닥뜨리다보면 역시 그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채식이 더이상 특이한 취향이 아님에도 여전히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은 많고, 그 시선 속에는 대체로 엄격함과 인색함이 묻어 있다. ‘평범’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것들에 으레 던져지는 그런 곱지 않은 시선 말이다.

 

대개는 흔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언제부터 고기를 안 먹었어요?” “한 4년 전부터요.” “아니, 왜요?” “여러가지 이유로……” 모호한 대답 탓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그 이유라는 게 대체 뭔데요?”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나는 되도록 상식적인 수준의 답을 제출한다.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고르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에 반대해요.” 공장식 축산? 상대는 눈을 부릅뜬다. “그렇담 우유나 계란도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꾸중 섞인 일침이 날아온다. “생명을 해치는 게 싫어서요”라고 한다면? 곧장 “가지도 오이도 생명이에요” 하는 말이 돌아온다. “소나 돼지는 안 먹는다면서 고등어는 먹어요? 너무 모순이다” 하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핀잔 끝에, 어쩌다 꺼내 신은 구두나 손에 쥔 핸드백을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이도 있다. 그거 설마 가죽은 아니겠지? 하고. 고기 안 먹으면 살이 좀 빠져요? 슬며시 몸을 훑는 이도 있다. 이런 식의 날선 대화와 승강이를 반복하느니 차라리 ‘초딩 입맛’을 자처하는 게 수월할 것이다. 우스개는 될지언정 요상한 검열과 질타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고기를 먹지 않는 데에는 정말이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우선은 때때로 어떤 음식 앞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고 난 후의 일이다.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식탁 위에 근사하게 차려진 것들이 시체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곤 한다. 아무래도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설명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 매 순간 타인에게 나의 감정과 행동 하나하나를 납득시키는 일을 나는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어떤 취향을 고집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그 이유란 당장 이해하기 힘든 무엇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나의 취향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내가 끼면 그만큼 메뉴 선택의 폭이 좁아지니까. 바로 어제만 해도 점심 무렵 만난 한 사람과 식당을 정하기까지 한참을 주저했다. “저건 먹을 수 있어요? 아, 안 되겠다. 베이컨이 들었네” 할 때, 그럴 때면 크나큰 민폐덩어리가 된 기분. “아녜요, 괜찮아요, 드세요, 드세요” 손을 과장되게 가로저어가며 겨우 정한 낙지볶음을 먹고 헤어졌으나 그날 밤 내내 나는 편치 않았다. 절단된 낙지 다리를 씹을 때의 물컹한 질감과 비린 맛이 가시지 않아 자꾸만 입 속을 더듬거려야 했다. (눈을 가진 생물을 씹어 삼키기란 역시 힘든 일. 고기가 아니라 해도.) 이런 식이 계속되는 한 나는 나대로, 내 취향을 배려하느라 애쓴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지쳐 나가떨어질 게 분명하다.

 

실제로 최근 가까운 한 사람은 짐짓 가벼운 투로, 그러나 실은 제법 진지하게, 고백했다. “알지? 너랑 밥 먹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닌 거.” 이후 나는 더욱 소심해진 채식(주의)자다. 친구나 가족조차 기꺼워하지 않는 취향을 나는 가졌구나. 이같은 사실을 상기하자 당장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저 혼자 조용히 먹는 일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는 조금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점차 혼자가 되는 일. 이런 일은 좋은가, 괜찮은가. 누구나 그렇듯 나도 그저 하나의 기호를 가졌을 뿐인데, 어째서? “그래선 안 되잖아. 맛있자고 누군가의 몸을 빼앗아 먹고, 따뜻하자고 누군가의 털을 빼앗아 입는 거. 그거 너무한 거잖아.” 정작 나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말할 수 없었는데.

 

*이 글은 지난 4월 20일 『경인일보』에 수록된 「채식주의자입니다만…」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소란 / 시인 

2018.10.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