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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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두발의 자유를 넘어, 두발로부터의 자유를

김성윤

김성윤

고1 때였나. 한문 시간에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말을 배웠다. 궤변 만들기를 좋아했던 나는 교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두발 단속 같은 거 하면 안 되지 않나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적 언어로 비판하는 훌륭한 대응이었다. 어쨌든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교사를 당황시키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서울시 교육감의 두발 자유화 예고로 말이 많다고 들었다. 답답한 노릇이다. 어지간하면 상대의 논리를 차근히 들어보고 이런저런 반문이라도 던져보겠는데 이건 솔직히 그럴 감이 못 된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두발 단속이 우리를 시민이 아니라 신민(臣民)으로 만드는 기술(technic)이라는 사실이다. 아직도 이런 기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음 셋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다방면의 선진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심각한 문화지체에 빠져 있거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억압함으로써 특정한 향락을 독점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둘 모두이거나.

 

심지어 두발 단속은 실효성조차 의심스럽다. 짧은 머리를 하면 단정해지는 걸까, 긴 머리를 하면 불량해지는 걸까. 학교폭력을 비롯해 교실 붕괴 현상이 심심치 않은 게 머리 길이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전국 중고등학교의 70% 이상이 두발을 규제하는데도 왜 공교육은 갈수록 무너진다는 걸까. 과학적 분석을 뒤로한 채 굿판을 벌여 불안감을 상상적으로 치유하는 짓은 더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냥 말 잘 듣는 청소년이 많으면 좋겠다고, 청소년들이 순종하면 좋겠다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게 바로 그 말 아닌가. ‘너희에게 자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아. 그건 우리 어른들만 누릴 수 있는 향락이지.’ 이렇게 솔직해지면 대화든 토론이든 속도가 붙을 텐데, 애먼 논리와 수사로 포장하려 드니 그 허황됨을 깨치느라 골치가 아프고 싸움만 길어지는 형국이다.

 

그렇다. 청소년 또는 학생의 머리가 짧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만 기성세대가 문화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다른 한편 이를 간접적으로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다른 효과가 있는가. 있으면 말해달라. 학교가 건전해진다고? 그 많은 짧은 머리에도 학교는 이미 ‘배틀 그라운드’다.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어른들이 망친 세상을 왜 청소년 탓하고 앉아 있나.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엉뚱한 데로 시선을 돌리게끔 하는 수작 아닌가. 이건 무슨, 정치 문제 가리려고 연예인 스캔들 터트리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두발 자유화 논쟁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 같은 걸로 포장하려는 모양인데 어불성설이다. 공동체주의라니, 그건 전체주의다. 그것도 일제 군국주의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관계로 탄생한 동아시아식 전체주의 군사문화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시쳇말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건만 우리는 아직도 식민-후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전체주의를 내면화하고도 자신이 전체주의자라는 사실에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못 느낀다면 이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 아닌가.

 

물론 단순히 식민지성을 청산하지 못한 문제만 있는 건 아니다. 사안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독특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시민 주도가 아니라 위로부터 역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수동혁명’이라 부른다. 1980년대 전두환정권 때 두발 자유화 조치가 그렇다. 돌연 찾아온 자유, 이것이 정권의 희박한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도구적 자유였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시민들 손으로 얻어낸 문화적 자유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니 그게 실질적 자유였는지에는 늘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문화 변동이라는 건 다른 분야와 달리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알다시피 두발 자유화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시행되고 노태우, 김영삼 정권을 거치면서 사실상 죽은 조치가 돼버렸다. 두발 자유화는 ‘두발 단속 자유화’로 탈바꿈했지만 거의 누구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었겠지 싶다. ‘자유? 자유화 시대인데 당연히 허용돼야지. 두발을 규제할 자유!’ 우리는 권위주의의 자장으로부터 온전한 자유의 영역을 만들지 못했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좋은 자유가 나쁜 자유에 침식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두발 규제. 그것은 청소년 또는 학생을 더 편리하게 관리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 시절의 통제 경험을 통해 신민이 되는 압박을 받아왔는지 모른다. 타협 불가능한 자기 권리가 침해돼도 순종하는 존재, 타인의 인권이 짓밟히는 걸 봐도 별다른 감응을 모르는 존재 말이다. 공적 존재로서 시민이 만들어지는 걸 누군가는 무서워하는 모양이다. 두발 자유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결국 두 부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회 전체적으로 시민성이 고양되면 잃을 게 많아지는 기득권 세력, 또는 그들의 논리에 휘말려 다른 이가 시민이 되는 걸 차마 볼 수 없는 영락없는 신민.

 

오늘날 우리는 감옥 같은 학교에 청소년들을 가둬놓고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병영문화를 체험케 한다(사실 공교육 붕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모순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 이렇게 어떤 명분도 실효성도 없는 식민지+전체주의 유산을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를 타파하는 일을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부디 청소년 인권이라는 대의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 좋겠다. 논란이야 어떻든 이제 두번째 자유화 바람이 불어온다. 이번에는 불가역적인 좋은 자유여야 한다.

 

김성윤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2018.10.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