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메이지 150주년과 내전의 기억
지난 10월 23일, 토오꾜오 헌정기념관에서는 ‘메이지(明治) 150년 기념식전’이 열렸다. 이 날은 일본의 연호가 케이오오(慶應)에서 메이지로 바뀐 지 150년이 되는 날이었다. 정부여당인 자민당 의원을 중심으로 수많은 국회의원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아베 신조오(安部晋三) 총리는 “메이지 사람들이 용기와 영단(英斷), 부단한 노력과 분투로 세계를 향해 활짝 가슴을 펴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미 1년 전부터 아베정부는 메이지 150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계획했다. 정부의 기념식전으로 정점을 찍은 일련의 행사는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그만큼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메이지를 둘러싼 역사인식 논쟁이 다양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물론 기시감 있는 대립도 있다. 근대일본의 식민지배/침략전쟁을 둘러싼 상이한 역사인식이 역시나 뜨겁게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특별하게 음미해봐야 할 다른 갈래의 역사인식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아베가 몇차례에 걸쳐 감행한 ‘도발’과 관련된다.
관군사학, 내전의 기억을 자극하다
메이지유신은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여 일본을 중앙집권화된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킨 사건이다. ‘유신’은 오랜 시간에 걸친 중층적 사건으로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관군(官軍)과 적군(賊軍)’ 사이의 내전을 거쳐 마무리된다. 이때 관군이란 천황을 옹립한 사쓰마(薩摩, 지금의 카고시마현)와 초오슈우(長州, 지금의 야마구찌현) 주도의 연합군을 뜻하며, 적군이란 마지막까지 막부군과 함께한 세력을 지칭한다. 이때 적군의 주축이었던 세력이 아이즈(會津, 지금의 후꾸시마현)의 무사들이었다. 초오슈우 출신의 아베 총리는 올해 연초 국회연설에서 이 아이즈 출신 명사의 이름을 거론하며 메이지 정신을 계승할 것을 주장했다.
“야마까와 켄지로오(山川健次郎)는 150년 전 메이지시대가 시작된 순간을 정부군과 싸운 뱟코따이(白虎隊)의 일원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정부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그의 능력을 살려 활약할 기회를 열어줬습니다.” 야마까와는 토오꾜오제국대학 총장을 역임한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즉 적군의 최후 결사대 출신 야마까와를 등용할 정도로 메이지정부는 온 국민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아베의 메시지다. 메이지의 열린 정신을 모범으로 ‘일억총활약사회(一億總活役社會)’라는 현 정권의 슬로건을 홍보하고자 한 셈이다. 또한 지난 8월 26일, 카고시마에서 예정된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선언에 앞선 당 내부회합에서, 아베는 메이지 150년을 맞이하여 ‘삿초오동맹’(사쓰마-초오슈우 동맹)의 정신으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노력하자고 발언했다. 명백히 ‘관군사관’을 전면에 내세운 이 발언은 물의를 일으켰다. 관군사관은 사쓰마와 초오슈우가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막부군의 무지몽매를 타파하여 일본을 발전시켰으며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적 통합을 이뤄냈다는 역사관으로, 패전 전의 권위주의적 천황제를 근대일본의 정통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관은 관군 전몰자의 추도시설로 출발한 야스꾸니신사가 국가라기보다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는 데에서 극명하게 표명되어 있다.
아베는 이런 역사관을 여러 차례 노골적으로 표출한 바 있는데, 메이지 이래 일본은 승자의 아량 아래 반역자까지 포용하는 열린 사회였음을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이 도발을 접한 토오호꾸(東北, 과거 적군의 중심지)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착잡하다. 야마까와를 등용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내전 직후 관군은 적군을 끝까지 토벌했으며 메이지 이래 토오호꾸 출신이 정계·관계·학계·재계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받아온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베의 도발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표면화하지 않은 이런 역사와 차별의 기억을 새삼 끄집어냈다. 150년간 애써 마음속에 간직한 내전의 기억을 자극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민지배/침략전쟁의 미화에 더해 국내적으로도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을 일삼는 아베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베 신조오, 역사전쟁을 선포하다
2006년 제1차 집권기부터 변하지 않는 아베의 정치신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이 그것이다. 아베에게 전후 레짐이란 ‘강요된 헌법’을 중심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해온 자학의 체제다. 이를 극복하고 ‘일본을 되찾는(日本を取り戻す)’ 것이 아베의 정치적 궁극 목표다. 극도로 수사적인 이 슬로건에는 현재의 일본이 진정한 일본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에게 진정한 일본이란 사쓰마와 초오슈우가 주도한 메이지유신의 정신을 간직한 나라이어야 하기에, 천황제 국체(國體)를 중심으로 개개인이 모두 국가를 위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일본의 모습이다. 그가 보기에 국민의 의무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해온 전후 레짐은 진정한 일본을 형해화시킨 허위의 체제이며, 이를 타도하여 진정한 일본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쓰마와 초오슈우의 위대한 결단과 내전이 근대일본의 출발점, 즉 메이지유신의 기원임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메이지 150년은 아베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야만 ‘일본인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전후 레짐에서 벗어나 제기할 수 있기에 그랬다.
패전 후 일본 국민은 일본인이기 이전에 보편인류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국가방위를 국제사회의 신뢰에 위탁한 전후 헌법의 이념이 이를 말해준다. 1945년 이후 ‘애국심’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금기시된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베는 2006년 이래 ‘아름다운 나라’와 ‘애국심’을 강조하며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때 일본인의 ‘일본인 됨’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그것은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본의 독립을 지킨 삿초오동맹에서 비롯된다. 현대의 일본인은 이 기원 없이 성립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역사관이다. 자위를 위한 전략적 선택(식민지배/침략전쟁)과 내전으로 성립한 국가, 그것이 아베가 ‘되찾고자’ 하는 ‘일본’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이지 150년은 아베가 국내적으로 선포한 역사전쟁의 시발점이다. 특히나 후꾸시마와 오끼나와라는 ‘내부 식민지’로 인한 갈등이 정권의 유일한 정치적 불안요소인 현재, 내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일본인이 모두 평등한 국민이 아니라 내전의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역사적 차별을 내장한 존재임을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상식적으로는 내전의 기억은 봉합되어야 마땅하고 패전 후 일본은 특히나 기억을 봉인해왔다. 하지만 아베는 몇차례에 걸친 노골적 도발을 통해 기억을 환기했다. 메시지는 명확하다. 국가(관군)에 대한 저항과 비판(적군)은 아량으로 받아줄 수 있지만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만일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토벌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다. 메이지 150년은 내전의 기억을 통해 아베의 정치를 끝까지 밀고 가겠다는 대국민 협박의 계기이기도 한 셈이다.
이렇게 아베는 교묘한 언사로 선전포고했다. 현재 일본 서점가에는 이에 응전하듯이 관군사관을 비판하는 책이 즐비하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일본의 역사 내전은 어떻게 전개될까? 일본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의 향방을 가늠할 결정적 바로미터는 아니더라도, 일본의 이른바 ‘수구보수화’를 두텁게 읽기 위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임에는 틀림없다.
김항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2018.11.2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