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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의 의미를 일러주는 소설들: 2019년 신춘문예 소설 리뷰

양경언

양경언

전예진의 소설 「어느 날 거위가」(한국일보)에는 군부대 근처에서 2년째 ‘치킨집’을 운영하는 부부가 나온다. 주말이면 외출이나 외박, 면회를 나온 군인들이 찾는 덕에 그럭저럭 굴러가던 부부의 가게는 장병들 사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린 이후부터는 손님의 발길이 부쩍 준다. 가게 운영의 안녕이 최우선 과제였던 부부가 근심을 거둘 리 없는 이같은 정황에서, 소설은 부대로 배달을 갔던 남편이 한 군인으로부터 몸집이 큰 거위 한마리를 데려가라는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전환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무슨 거위’인가, 부대에서 걸려온 ‘장병장님을 먹었느냐’는 전화는 또 무엇인가, 군인들이 거위로 변하는 설정의 소설이라면 ‘거위’는 군대 내 문제의 알레고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점점 심경이 복잡해지는 독자와는 달리 소설 속 부부는 닥친 상황에 적응하느라 딴생각을 하지 못한다. 사람이 먹는 치킨을 주지 않으면 난폭해지는 거위를 달래느라, 그사이 외출금지가 풀린 군대로 인해 다시 붐비기 시작한 가게를 살피느라. 손님들 몰래 키우던 거위가 가게에 나타나 푸드덕거리며 소동을 피우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인데, 당황한 손님들이 비명과 욕설을 지르는 모습, 그 와중에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몇몇 군인들, 발길질하는 시늉을 내며 가게 밖으로 거위를 몰아내는 남편의 모습이나 당황한 아르바이트생의 엉거주춤하는 모습이 뒤엉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실감을 전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소설은 인물들 앞에 닥친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면으로 서술하지 않고,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속수무책으로 있어야 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거기에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에 주력한다. 우리가 살면서 황당한 (그래서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겪는 중에는 그 일이 마치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불쑥 우리 앞에 던져진 것처럼 느껴지고, 해당 사건의 진면모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설명을 꺼내놓을 수 없듯이 소설 속 인물들도 별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내 앞에 닥친 일들도 처리하기 쉽지 않은 세상살이인데 소설을 들여다보면서까지 굳이 그런 인물들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실제 삶에서 난감한 일을 겪는 경우, 우리는 으레 이전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몸의 관성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기 십상일 테다. 혹은 사건이 떠밀듯이 안겨주는 감정에 골몰해 있기 바쁘므로 자칫 한정된 시야에서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 여기려 들 수 있다. 좀처럼 사건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소설 속 인물들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소설은 그런 상황에 놓인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우왕좌왕이 낳을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한다. 또한 실제 삶에서 ‘잘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 자꾸만 헤맨다는 느낌을 떠안고 살아가는 독자에게 당신의 우왕좌왕은 곧 사건의 한복판에 있다는 증거이므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임을 일러준다. 소설을 만나는 시간은 곧 우리 스스로가 망연자실과 한탄에서 벗어나는 단련을 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문학작품을 선보이는 통로가 좀더 다양하게 개척될 필요가 있다는 제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옴에도,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신문마다 ‘신춘문예(新春文藝)’라는 지면을 빠뜨리지 않고 마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삶은 여전히 우왕좌왕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누구든지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에는 그 우왕좌왕이 좀더 격려받아도 되기 때문이다.

 

거위의 소동에 조바심이 일었던 「어느 날 거위가」를 포함해서 올해 신춘문예로 만난 소설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충실한 해명보다는, ‘이제 어떻게 하지’와 같은 처리에 무게중심을 실어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이야기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 역시 다르게 구성하는데 가령 상실한 대상을 애도하기보다는 상실을 겪고 남겨진 누군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무언가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인 ‘할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 자꾸 상실한 대상과의 기억으로 우회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그러하다.

 

간략하게나마 소개하자면, 동성 연인인 ‘나나’를 잃은 ‘연주’가 조카 지민에게 나나가 ‘왜’ 죽었는지 보다는 ‘어떻게’ 죽었는지 거듭 설명하려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류시은의 「나나」(경향신문), 결혼을 앞둔 ‘내’가 버스에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과거 연인 ‘경희’를 떠올리는 채기성의 「앙상블」(서울신문), 외국인 룸메이트 ‘루’가 이음매 역할을 해준 덕분에 왕래가 별로 없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지 물꼬를 트기 시작하는 이한슬의 「어떤 사이」(세계일보)가 여기에 해당할 것 같다. 소설의 결말에서 인물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마냥 망연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자신의 망연함을 전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난 뒤의 독자는 그들과 더불어만 있지 않고 망연함 건너에 있을 것 같은, 해명이 더 필요한 이야기의 공간으로 넘어가고 싶어진다.

 

독자인 우리는 폐차 작업을 하는 ‘정호’와 ‘정기’ 형제가 자신들의 황량한 삶을 부여잡고 별 수 없이 그냥저냥 살아가는 도중에 이들 형제의 눈에 눈밭 속에서 살아가는 이름 모를 부자가 들어오는 장면(장희원 「폐차」, 동아일보), 혹은 가출한 아버지를 찾아간 딸 앞으로 무심한 듯 콩떡을 던지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우적우적 콩떡을 씹어 삼키는 딸의 모습(김지현 「흰 콩떡」, 부산일보)으로 끝을 맞이하는 소설들을 만나면서야 새삼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와 같은 소설 속 인물들의 물음은 실은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가?’의 낌새와 닿아 있다는 것을.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왕좌왕을 한바탕 겪을 때야 우리 역시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내 앞에 닥친 일들도 처리하기 쉽지 않은 세상인데 굳이 이 시기에 신춘문예를 통해 나타난 새로운 소설을 챙겨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세상살이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같은 이유를 답으로 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양경언 / 문학평론가

2019.1.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