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동물보호단체 ‘케어’의 안락사가 남긴 숙제
새해를 며칠 앞둔 어느날 밤, 작은 케이크 하나를 사들고 아내와 함께 낯선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 집엔 초인종이 없어서 한참 동안 밖에서 서성인 후에야 겨우 주인 남자와 만날 수 있었다. 커다란 개가 자기 집도 없이 짧은 줄에 묶여 차가운 비바람을 몽땅 맞고 있어. 언젠가부터 아내는 회사 근처를 산책하다 만난 개 한마리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까치발을 들고 담장 너머로 손을 흔들면 코쿤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해. 코쿤이? 응, 코드쿤스트라고 「쇼미더머니」에 나왔던 랩퍼야. 둘이 꽤 닮은 것 같아서 그렇게 이름을 지어줬어.
나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던 남자에게 케이크를 건네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개에게 집 하나 마련해주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책길에 알게 됐는데 그새 정이 들었거든요. 아내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코쿤이가 저 멀리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겅중겅중 뛰어올랐다. 지금 저 개 때문에 이 밤중에 여길 찾아온 거라고요?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우리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남자는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가는 길에 혼자 속으로 온갖 봉변을 당할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안 그래도 집 해주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워낙 일이 바쁘다보니…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바쁘시면 저희가 집 사서 문 앞에 두고 갈게요.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집 개니까 내가 해야지. 아니 근데 정말 저 개 때문에 이렇게 오신 거예요? 남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내가 아내를 쳐다보던 눈빛이 꼭 그와 같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년쯤 아내는 동물보호단체 회원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주변의 동물들과 인터넷에서 접한 각종 동물 학대 사연들을 안타까움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내게 전해주었다. 하지만 동물권에 대해 무심했던 나는 솔직히 그런 대책 없는 분노와 바닥없는 절망이 조금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었고 딱히 해답도 없는 문제에 감정을 소모하는 게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어차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의 고통을 우리가 나서서 없애줄 순 없어. 단순하게 생각하고 밝은 마음으로 살자. 나는 우리가 세상의 참혹하고 어두운 면보다 아름다움에 조금 더 눈길을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아마 그런 식으로 말하던 시절의 나였다면 케이크를 준비해 낯선 사람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일 같은 건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살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동물들의 고통을 단순히 구조적인 것으로, 그러니까 개인이 함부로 나서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여기고 체념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고민하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물론 나는 아직 여전히 부족하다.) 그랬기 때문에 최근 불거진 동물보호단체 케어 박소연 대표의 안락사 의혹은 새해 벽두부터 우리의 마음을 잔뜩 처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아내가 불같이 화를 내거나 케어 대표를 마구잡이로 비난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보인 반응은 좀더 복잡하고 착잡한 종류의 것이었다. 왜 꼭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은 현실에 벽에 부딪혀 일그러지고야 마는 걸까.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위험에 맞닥뜨릴 필요도 없이 그저 마음 편히 그런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며 자신의 온전함을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전부터 국가와 사회가 방치해놓은 일을 개인이 감당하는 일의 어려움과 한계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누었던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건 케어 대표의 행동을 두둔하려는 것과 무관했다. 다만 케어 대표 한명의 위선적인 행태를 지탄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현실은 ‘악마’ 같은 그녀 혼자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사회적 지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이 사태에 연루되어 있는 공범이라는 것이 사태의 진실에 더욱 가깝지 않을까. 펫숍의 쇼윈도 안에 있는 작고 앙증맞은 강아지를 보며 ‘귀엽고 예뻐서 사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량한 마음은 여기서 무죄인가. 최소한 그 많은 강아지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전적으로 무심하고 무지했던 나는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할 수 없었다.
작년 여름 아내와 함께 유기동물보호소로 자원봉사를 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똥과 오줌이 널브러진 바닥을 청소했던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역한 배설물 냄새가 살갗에 들러붙은 것 같았고 침대에 누워서도 개들이 컹컹 짖던 새된 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하재영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창비 2018)을 읽게 된 건 자원봉사를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가 보았던 지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진짜 지옥은 번식장과 경매장, 개 농장과 도살장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책장을 넘기며 두려운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박소연 대표는 지난 19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락사의 불가피성을 항변하며 개 도살을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일각의 비판처럼 이는 자신의 혐의를 물타기 하려는 시도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단지 신의성실과 정직을 회복하는 도덕적 운동을 펼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짐짓 알면서도 속아주는 결단도 필요하지 않을까. 박대표 개인에 대한 지탄과 별개로 그녀가 거론한 문제들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사태를 한 개인의 부도덕한 행태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동물의 ‘생산’과 ‘소비’, ‘처분’을 둘러싼—이 용어들에서 알 수 있듯 현재 동물은 생명이 아니라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다—작금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드러내고 해결책을 모아가는 계기로 삼는 일이 긴요하다. 그것이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간 그 생명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애도의 실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동안 마음 힘들어하던 아내는 후원단체를 하나 더 늘렸다. 그녀 역시 이러한 후원이 번식장과 펫숍, 그리고 유기견 보호소로 이어지는 이 악무한의 고리를 단칼에 끊을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작은 손길은 박대표의 기이한 악행이 촉발한 대중적인 분노의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소중한 계기임은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박소연 사태의 제2막을 힘껏 열어젖혀야 한다. 이 수많은 생명들의 고통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박소연 사태가 남긴 과제는 ‘죄 없는’ 우리들에게도 만만치 않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9.1.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