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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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너는 너의 상주가 되지 않으리

문동만

문동만

소개팅이 있다고 옷을 입었다 벗었다 머리를 풀었다 묶었다 몇시간째 단장을 하고 있다. 옷을 두껍게 입고 가라 일러두지만 얇은 옷차림으로 신나게 나가더니만 기어이 날이 너무 춥다고 데리러 오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맘대로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걸 확증시켜주기 위해 신이 자식을 보냈다고 하는데 내내 철들지 않는 것 같은 아이가 팔짱을 끼며 나와줘서 고맙다고 아양을 떨었다. 아직도 손안의 아이 같기만 한 딸아이가 몇살이던가. 곰곰 따져보니 제 엄마가 나와 결혼식을 하던 나이를 지나친 것이다. 자식과 오래 산다는 건 행복만은 아니다. 어질러놓은 방과 치우지 않는 설거지를 보면 울화통이 터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웃으며 싸우며 살아온 지가 이십몇년 세월이니. 그래도 함께 살 수 있는 건 내 새끼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뭔가 애틋한 그런 것이 있기 때문일 게다.

 

어떤 자세로 죽을 것인가 고심한 사람 같았다

부목도 없이 절뚝이며 진눈깨비 속을 걷던 너는

새순 같은 혀를 말아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누구도 쓰러진 너를 진맥하거나

푸르뎅뎅한 눈꺼풀을 열어보지 않았다

 

-졸시, 「너는 너의 상주가 되어」 부분

 

딸아이와 동갑인 용균이가 남긴 동영상 중에는 취업기념으로 부모님이 사준 양복을 입고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그 옷은 일상적으로 입을 수 있는 출근복이 아니었다. 탄가루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랜턴 하나를 들고 굉음이 나는 컨베이어를 검수하러 작업장으로 홀로 향했다. 컨베이어를 따라가는 석탄덩어리가 밑으로 떨어져 벨트가 간섭되지 않도록 2인 1조로 해야만 하는 일이 그의 업무였으나 석탄 대신에 파견비정규직이라 명명된 그의 몸이 기계에 말려 들어갔다. 암실 같고 막장 같은 그곳에서 참혹한 육신으로 절명했다. 그의 몸이 으스러지는 동안 아무도 곁에 없었다. 비명을 들은 이도, 손을 내밀어준 이도 없는 최후. 우리는 흔히 임종을 ‘지킨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동행할 수 없는 소멸의 시간일망정 생의 마지막에는 서로의 눈빛을 보며 손을 잡으며 이별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일 게다. 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집을 떠나는 아들을 배웅은 했으나 마중은 하지 못했다. 바스러진 몸을 60일 동안 냉동고에 두고서야 마침내 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이와 가족들과 동료들과 이 세상의 ‘을’인 사람들의 강단진 슬픔과 투쟁으로 28년 만에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용균이를 추모하는 작가들의 미력하고 조촐한 시낭송회가 있었다. 주말의 광화문광장은 자동차 소리, 인파의 물결, 빌딩숲에서 벼려진 칼바람의 거리였다. 이뿐인가. 각종 찬송가와 군가가 울려퍼지는 극렬한 구호의 전장 같았다. 조용히 산책하고 관람할 여백을 주지 않는 소음이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미학이 굳이 있다면 마주하기 불가능할 것만 같은 ‘비장미’가 아닐까. 지록위마의 시절을 지나면 또다시 언어도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곳이 바로 광장이었다. 성찰하지 않는 정치와 미디어들은 늘 정략적 사건들을 만들어 쉼없이 유포·재생산하며 이러한 참담한 불행을 주변부적인 것으로 매장해버린다. 정말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는 무감하게 하고, 별것도 아닌 것들을 악의적으로 사건화한다. 어느 시절이 와도 심판받지 않는 밤의 권력들은 커다란 전광판에 별반 중요하지도 않은 오늘의 뉴스를 도열시킨다.

 

가짜뉴스와 진짜 뉴스를 분별할 수 없다. 교보문고에 걸려 있는 시 몇줄이 그나마 얼고 시린 귀들을 씻겨줄 수 있을까.

 

누구나 노동을 하지만 이 세상의 깊은 굴속에 노동을 사생아처럼 숨겨놓은 듯하다. 저 날카로운 구호와 저주를 외치는 사람들도 노동을 했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를 읽는 작가들도, 쓴다는 노동을 하거나 또 뭔가 일을 해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의 생활은 유령들의 잠행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은 남루함의 다른 이름이며 지겨움의 동의어이며 심지어 적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그 용어 자체가 혐오와 공격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모두가 수행하면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해보라.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는 노동도 안타깝지만 용어 자체부터 천대받는 노동이 만인에게 더 위험하지 않는가.

 

나는 시간에게도 소유주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누가 우리의 24시간을 지배하는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이 세계를, 누구나 뜨겁고 맑은 피를 갖고 태어났건만 잿빛 두부 같은 선혈을 흘리며 굳히며 24시간을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가. 분명히 그 24시간의 시스템 속엔 수뇌부가 있을 것만 같은데, 24시간의 지배자가 있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것을 추적하기에 앞서 각자의 호리병이 중요하고 각각의 부리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계급은 단일하지 않고 착취의 방식도 균일하지 않으므로, 소득과 살림이 계층화되므로.

 

결국에는 노동자가 노동자를 질시하고 자영업자와 노동자가 대립하고 세대와 세대가, 남녀가 대립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쉼없이 혐오의 대상을 사냥하듯 찾아나선다. 사람을 욕하다 지치면 동물까지 혐오하면서. 어떤 권리들은 보편적 윤리를 압도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하면서.

 

흉부와 허기진 바닥을 쪼아대던

뭉툭한 부리는 누진 깃털에 고이 잠들었다

삼월의 늦은 눈이 푸른 눈꺼풀을 덮었다

너는 너의 상주가 되어 너를 끝마치었다.

 

-「너는 너의 상주가 되어」 부분

 

내가 이날 읽은 시는 오래전 서울 서부역 길가에서 쓰러져 죽어가던 비둘기를 보며 쓴 시였는데 신기하게도 시를 읽는 동안 내 발끝에 비둘기 한마리가 내려와 총총 두리번거리다 한참을 앉았다 갔다. 그 찰나가 무슨 조화인지 알 길은 없으나 나는 억울한 목숨들에게 환생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날개가 있는 생명으로 잠깐이라도 왔다 갈 것이라 생각했다. 한없이 슬퍼 보이는 우리들 또래일 김미숙씨의 얼굴에서 1970년 11월 13일, 한 사람의 어머니에서 만인의 어머니가 된 한 어머니의 잔영이 스며드는 것도 나는 보았다. 용균은 혼자 쓰러졌으나 부축해 함께 날아가려는 천상의 날개들이 많았다.

 

문동만 / 시인

2019.2.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