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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디디의 우산』을 읽고

한기욱

한기욱

2016년 10월 말 시작되어 이듬해 봄에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과 문재인정부 출범의 동력이 되었던 촛불혁명은 진행형인가? 어느덧 혼탁해진 국내정치를 지켜보면 언제 혁명 비슷한 일이라도 있었나 싶다. 그런가 하면 2차 북미회담을 앞두고 또 한번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진전과 한반도 대전환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확연하다. 게다가 촛불정부 출범 이래 계속되는 적폐청산과 아울러 낡고 권위적인 조직문화와 성차별적 관행에 저항하는 미투운동과 갑질 반대운동까지 감안하면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혁명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이 요긴한데, 마침 소설가 황정은이 중편 둘을 함께 묶은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창비 2019)에서 바로 그 물음을 제기한다.

 

『디디의 우산』에 수록된 중편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눈여겨볼 것은 혁명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특이한 방식이다. 작가 나름의 새로운 혁명 개념을 제시하기보다 기존의 혁명운동이나 혁명관을 삐딱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비스듬한 시선으로 보이는 형상과 움직임을 그대로 진술하기보다 서사화하고 비평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낡은 세계의 제도·정동·사유에 침윤되지 않은 혁명 개념을 재구성하도록 이끈다. 가령 전도하듯 혁명을 주장하는 박조배의 종말론적 혁명론이 허세 가득한 엉터리 혁명론이라면(「d」) 진짜 혁명은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혁명’ 주제를 좀더 직접적으로 다루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는 한국사회의 주요한 시대적 흐름과 관련된, 대략 세가지 혁명적 계기가 등장한다. 금방 눈에 띄는 것은 촛불혁명이다. 박근혜 파면 선고일 오후에서 시작하여 그 첫 장면으로 돌아와 끝맺는 소설의 구조부터 촛불‘혁명’을 부각하는 셈이다. 하지만 정작 촛불시위는 짤막하게만 다뤄지며(11장), 그 현장에서의 태도도 열렬한 지지와는 거리가 있다. 화자는 ‘惡女 OUT’이라고 적힌 한 남성의 손팻말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만, 적절히 반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떨치지 못한다. 마지막 장(12장)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탄핵이 이루어진다면 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 동학농민운동, 만민공동회운동, 4・19혁명과 87년 6월항쟁까지,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 없는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313~14면) 화자는 ‘사람들’의 이런 평가에 이견을 달지 않은 채 촛불이 진정한 혁명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는데, 여기서도 독자는 ‘사람들’의 역사관과 혁명 개념이 과연 맞는지 돌아보게 된다.

 

또 하나는 1996년 연세대 투쟁이다. NL계의 범청학련과 한총련이 공동 주최한 제6차 8·15통일대축전을 ‘문민’정부를 자처했던 김영삼정부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가혹한 방식으로 진압한 바로 그 사건이다. 작가는 이 행사에 참여한 수많은 학생들이 경찰의 봉쇄와 최루탄 폭격, 진압시도에 내몰린 채 며칠간 한 건물에 갇혀 지낸 그 현장을—그때의 정황을 적나라하게 전하는 신문보도까지 인용해가며—특유의 정동적 언어로 실감나게 제시한다. 연세대 투쟁이 화자에게 어떻게 체감되었는지를 일러주는 상징적인 일화는 갇혀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생리혈로 얼룩진 바지를 입고 지낸 여학생 L의 이야기다. L은 사건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데, 화자를 포함해서 함께 갇혀 있던 운동권 동료들조차 처음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크리스떼바(J. Kristeva)의 ‘비체’(Abject, 卑體) 개념이 시사하듯 여기서 ‘생리혈’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비참함을 환기한다. L의 사건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연세대 투쟁은 화자에게도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체감된 것 같다. 투쟁을 주도한 NL계 한총련의 정치적 노선 문제에 대해서 화자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세번째는 페미니즘 운동이다. 화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 쪽으로 나아간다. 운동권에 대한 대학 안팎의 혐오가 널리 퍼지면서 “체감상 학생운동은 끝났”(186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왕성하게 활동했다 해도 남성 중심의 관행과 체질이 배어 있는 기존의 운동권에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운동권을 떠나서 페미니즘 활동을 한다면 혁명은 포기한 것인가? 화자에게 운동적 지침이 있다면 그것은 주류의 남성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성소수자, 장애인, 아이 등)에게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리와 몫을 주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이런 의식은 용산참사와 세월호참사 등을 겪은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감과 결합된다.

 

학교, 직장, 가정에서 벌어지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 혐오와 갑질의 사례들은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어려운 연유를 적시함으로써 향후 일상에서 싸워야 할 지점들을 드러낸다. 그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딸과 아버지의 관계다. 화자는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삼중관계에서 약자 처지인 딸이 바라본 아버지의 삶과 언행을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딸은 가부장적 폐해를 뚜렷이 자각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아버지가 불쌍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이제 아버지가 비열한 짓을 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이 소설이 남기는 묵직한 과제는 페미니즘 운동과 촛불혁명이 어떻게 만나야 서로의 혁명적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세월호 관련 시위와 촛불시위에 참여해온 소설의 화자도 짐작하듯, 정치적 혁명운동과 단절된 페미니즘 운동만으로 한국사회 전체를 바꾸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현재 진행되는 페미니즘 운동과 갑질 반대운동의 힘찬 활력이 없다면 촛불혁명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하더라도 촛불혁명의 동력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사실, 촛불혁명이 시작된 무렵부터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폭력과 혐오를 고발하고 남성 중심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는 페미니즘 운동과 갑질 반대운동은 적폐청산과 더불어 촛불혁명의 강력한 보루였다.

 

작금의 혼탁한 정국은 촛불혁명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바라는 바다. 수구세력의 준동과 반격은 예상했던바, 촛불정부와 여당은 이를 의연하게 대처하고 감내할 일이지 선거법 개정 같은 관건적인 정치개혁을 회피할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 시점에서 정치개혁 문제를 정부와 여당에만 맡겨놓을 게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여러 운동들이 더 긴밀하게 결합하여 정부와 여당이 주요한 정치개혁들을 실행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촛불혁명은 진행형이지만 지금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한기욱 / 문학평론가,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2019.2.2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