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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유토피아라는 비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보고

이정진

이정진

좀비영화가 오랜 기간 주로 폭력적인 장르물로 소비되어오면서 많이 가려지기는 했지만, 좀비는 급진적인 정치적 상상력의 산물이며 그 인간-괴물의 형상 자체에도 혁명의 전망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괴물 형상의 비유적 의미는 단일하지가 않으며 여러 비유의 층위 간에 모순마저 존재하는 가운데, 일단은 이 단어의 일상적 용례가 시사하듯 부정적인 좀비상이 좀비 비유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맞다. 여타 괴물들과 달리 거의 전치(傳置)의 상상력이 억제되면서 탄생한 좀비는 인간 자체를 재앙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다수의 좀비물에서 좀비는 이미 좀비나 다름없는 상태에 다다른 인류의 절망적인 모습에 대한 비유로 활용된다. 예컨대, 쇼핑몰을 배경으로 삼는 등 이후 반복될 좀비서사 일반의 여러 관습을 확립한 로메로(G. Romero)의 「시체들의 새벽」(1978)에서 좀비들은 상품들 주위를 영원히 배회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무의식적인 차원까지 소비자본주의에 포섭된 현대적 개인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 할 것이다.

 

「시체들의 새벽」의 한 장면. 상품 주위를 영원히 배회하는 좀비의 모습은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시체들의 새벽」의 한 장면. 상품 주위를 영원히 배회하는 좀비의 모습은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좀비는 어긋나버린 세계의 증상인 동시에 그 세계를 붕괴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파국의 동인으로서 좀비는 고도의 감염성에 더해 군집 성향 때문에 그 위력이 배가된다. 이런 속성은 주체성의 상실이라는 좀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과 연관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혁명론이 상상하는 집합적인 민중의 이미지와 상통하기도 한다. 게다가 헐벗다 못해 허물어져 내리는 육체를 끌며 어슬렁거리는 좀비의 모습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관념의 육화라 할 만하다. 실제로 묵시록적 상황을 야기하는 현대판 좀비를 창안한 영화감독 로메로는 이른바 시체 시리즈에서 일관되게 좀비에게 불필요한 과잉폭력을 행사하는지 여부를 생존자 집단의 윤리적 시험대로 삼으며, 좀비를 대상으로 가차없이 드러나는 지배체제의 호전적인 폭력성을 강조한다. 이런 희생자로서의 좀비상은 그 집합적인 면모와 더불어 좀비의 혁명적 주체로서의 도약을 예비하고 있었다.

 

시체 시리즈를 종결짓는 「시체들의 땅」(2005)에 이르러 좀비는 마침내 혁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로메로는 파국적 상황이 혁명으로 이어지는 시리즈의 전개방향 속에서 대안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생존자들이 새로운 문명 건설로 나아가게 된다는 애초의 구상을 바꾸어 좀비를 혁명세력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런 착상의 이점은 좀비 전사들이 활약한 실제 아이티혁명의 역사가 혁명의 시나리오를 이미 구체화해놓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영화에서 좀비들은 약간의 재인간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전편들에서 축적되어온 좀비의 특성들을 보유한 좀비다운 좀비들이었고, 아이티혁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좀비의 자질이 곧 혁명의 역량으로 전환된다.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노예 전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영화에서는 평등하게 ‘열등한’ 좀비의 몸이 혁명의 무기가 된다. 생리작용이 멈추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들은 뇌가 파괴되기 전에는 전진을 멈추지 않는 불굴의 전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과거의 실제 역사를 모델로 완성된 이런 좀비혁명의 구상은 역으로 우리 시대의 정치운동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2007년 발발한 금융위기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 점령운동 당시 다수의 군중이 좀비로 분장한 채 시위를 펼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생전에 로메로는 인터뷰 자리에서 종종 농담조로 좀비에 자발적으로 감염되라고 독려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체들의 땅」에 이르러 좀비는 마침내 혁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시체들의 땅」에 이르러 좀비는 마침내 혁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로메로의 좀비혁명과 공명하는 예술적 상상을 펼치는 또 한명의 창작자가 있다. 바로 「부산행」(연상호 연출, 2016) 다음으로 K-좀비물의 성공을 이어가고 있는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2019)의 작가 김은희다. 다음은 조선시대를 좀비물의 배경으로 삼는 참신한 설정이 어떤 장르적 재미를 위한 포석이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인상적인 답변이다. “재미나 메시지보다는 보고 싶은 장면이 떠오르긴 했다. (…) <킹덤>에서는 왕부터 조정 대신, 양반과 상인, 백정과 기생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가 좀비가 된 세상을 보고 싶었다. 계층이 사라지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평등해 보이는 식욕밖에 남지 않은 세상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 보고 싶었다.”(『씨네21』, 2019.2.13) 김은희는 ‘좀비 유토피아’라 함직한, 과격하기 그지없는 이 정치적 비전을 극히 개인적인 열망 때문에 작품에 외삽된 것쯤으로 말하지만 그 비전은 대중서사의 표준적인 관습과 길항하며 이 시리즈의 고유한 면모를 낳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지 싶다.

 

순수하게 장르물로서 좀비서사에 열광하는 팬층에게는 좀비의 발생기원과 그와 결부된 생리적 특성에 대한 해명이 최대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데, 그 지식으로부터 좀비가 장악한 세계에서의 생존 게임의 룰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비판적인 정치 우화를 겨냥하는 로메로적인 전통에서 그런 서사의 요소는 대개 애매하게 처리된다. 반면 「킹덤」은 이례적일 정도로 좀비의 발생 과정을 자세하게 추적하는데, 동시에 뜻밖에도 아예 인간=좀비 등식을 명시적으로 못 박는다. 이 시리즈에서 식인 괴물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식인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좀비 장르 전체의 숨은 대전제를 선명하게 요약하는 듯한, 사람 고기를 먹고서 사람 먹는 괴물이 되었다는 이 설정은 생각만큼 그렇게 충격을 주지 않는다. 최초의 식인행위는 오히려 그런 상황으로 내몰린 존재들의 극단적인 처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먹는 것이 인육일 가능성은 충분히 암시되지만) 혼자서 몰래 시신을 요리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 행위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며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그 인물의 주장마저도 납득되는 것이다.

 

킹덤2

 

이렇듯 좀비의 파괴적인 속성을 적어도 불가피한 것으로 제시하는데, 「킹덤」의 뛰어난 점은 ‘진짜 좀비 찾기’라고 부를 수 있는 플롯 모티프를 통해 그런 과격한 시각을 설득력 있게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이 시리즈 속 가상의 조선은 흔히 대중적인 역사관에서 조선에 부여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엮어서 증폭시켜놓은 것으로서, 바로 현재의 한국을 ‘헬조선’으로 비유할 때 상상되는 원조 ‘헬조선’의 모습이다. 두차례의 전란을 겪고 난 후지만 세도정치의 폐해로 그 본래 기능을 상실한 국가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역량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표준적인 사극의 관습을 거스르며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된 일반백성들의 피폐한 삶은, 너무나 아름답게 촬영된 궁궐 풍경이나 양반들의 호화로운 잔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충격을 준다. 이렇듯 실제로는 이미 죽었고, 죽어 마땅하지만 백성의 살과 피[膏血]를 빨아먹고 유지되는 이 체제 자체야말로 좀비인 것이다. 체제의 이런 속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이 체제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왕이다. 이미 죽었지만 ‘생사초’로 되살려진 후 그는 말 그대로 인신공양을 통해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이다. 체제의 식인성은 그저 비유가 아니며, 진짜 괴물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이 괴물이 되는 지경까지 내몰린 것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좀비떼가 거침없이 분출하는 폭력성은 상당히 통쾌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분명히 이 한국형 좀비에게는 로메로의 좀비가 거쳐간 긴 진화과정을 훌쩍 건너뛰어 처음부터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자 반격’이며 ‘네메시스’로 등장하는 면모가 존재한다. 진즉에 봉쇄될 수도 있었지만 거듭해서 양반들의 무능과 이기심 때문에 순식간에 확산된 좀비떼의 경로는 어느 시점까지는 조선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린 왜란의 진행과정을 지배계급들에게 강제 복기시켜주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킹덤」이 「시체들의 땅」처럼 체계적인 혁명서사로 전개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공식 홈페이지의 대문을 장식한 시놉시스에는 주인공을 세자 이창이라고 못 박아두고 있다. 그의 대척점에 있는 악의 축이자 권력욕의 화신과도 같은 영의정 조학주는 이미 그 나름의 실험을 통해 좀비의 생리를 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즌 1이 끝나는 시점에서 그는 아마도 그런 지식에 근거해서 경상도를 봉쇄하는 방식으로 좀비 사태에 대처하는 중대결정을 내리는데, 수탈의 대상인 국토의 일부를 왜 포기하느냐는 딸(중전)의 예리한 추궁에도 요지부동의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동시에 좀비 사태가 주인공이 이상적인 통치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 하는 역경, 혹은 정치 스릴러 플롯에 초자연적인 색채를 입히는 설정으로만 활용될 것 같지는 않다. 더 강화된 운동성과 전염 속도의 증가 같은 좀비의 특성들도 신체 훼손의 방식들을 더 강렬하게 연출하기 위한 포석만은 아닐 것이다.

 

킹덤1

 

여러 정황상 시즌 1을 통해 이미 상당히 확실해진 것은 좀비의 파괴적 확산은 경상도를 넘어 전면화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게 문명이 붕괴되는 묵시록적인 상황이 펼쳐질 경우에는 주서사의 최종적인 지향으로 이미 설정된 세자의 권력복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경상도 또한 완전한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지는 않다. 세자는 경상도 땅에서의 성공에 기반해서 조학주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즌 2에서 좀비의 형상화는 시즌 1과는 달리 파괴적인 속성만이 부각되지는 않을 것이며, 어떤 결정적인 변이가 준비되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해명되기를 기다리는 시즌 1의 다수의 ‘떡밥’들이 추가적으로 밝혀질 좀비의 생리와 관련되는 듯하며, 무엇보다도 불굴의 의지로 좀비의 치료(재인간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의녀 서이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런 변이는 인간과 좀비 간의 모종의 연대 가능성을 열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조학주가 기획한, 시즌 1을 끝맺는 상황, 즉 국가의 일부가 격리되어 그 지역 인구 전체가 호모 사케르로 편입되는 과정은 섬뜩한 기시감과 함께 실제 역사의 선례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지는 알 길이 없지만 창작자가 그토록 강렬한 표현 열망을 느낀다고 밝히는 ‘좀비유토피아’상이 더 진전되어 그런 실제 역사에 대한 의미심장한 논평이기를 기대해본다.

 

이정진 / 문화평론가

2019.2.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