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다양한 기억, 확장되는 역사: 일본군 ‘위안부’ 전시회를 준비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재현하고 기억할 것인가? 피해자의 증언을 폄훼하고 부정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이 계속되는 한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일본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배상뿐 아니라, 전쟁이 무엇보다 여성의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데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한층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들이 증언하는 피해가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에 힘을 싣는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피해자들의 인생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이 개최한 전시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2.25~3.20, 서울도시건축센터)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전쟁 당시 연합군이 생산한 자료, 일본군 ‘위안부’를 목격했던 이들이 남긴 기록, 전쟁 이후 피해자의 삶과 고통에 공명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과 교차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다가선다. 이때 연합군, 특히 미군이 생산한 문서·사진·영상이 주요하게 활용된다. 연합군에 포로로 붙잡힌 조선인 ‘위안부’들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 이들을 심문한 결과를 담은 보고서, 전쟁이 끝난 후 ‘위안부’들을 배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승선명부가 대표적이다. 이들 기록은 ‘위안부’들이 동원되고, 착취당하고, 고향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연구팀의 일원으로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점은 어떻게 하면 피해자의 증언과 그 사실을 증명하는 기록 간의 대립을 해체할 수 있을지였다. 이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매도하는 일본과 그같은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는 한국 모두에서 보이는 익숙한 도식으로, 연구자들도 이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기록들이 주로 일본의 사과를 촉구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인가 아닌가로 대중과 언론에 평가되는 가운데, 연구자 역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록 중 피해자의 증언에 부합하는 것에만 주목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만이 곧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쉽다.
그러나 당시 연합군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전쟁범죄로 여기지 않았으며, 연합군 병사들은 ‘위안부’들을 동정하기도 했지만 점령지의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문젯거리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와 마주쳤던 연합군이 만들어낸 기록들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좀더 단단하게 뒷받침하는 버팀목인 동시에 그 성격이 규명되어야 하는 또다른 연구대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피해자의 증언 역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기보다 경청과 공감, 그리고 해석을 통해 상상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듣는 이의 태도와 자세에 따라 말하기 여부와 내용을 조절하고, 따라서 그들의 증언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60여년이 지난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이 드러나고, 운동의 성장과 함께 피해자들이 생존자이자 인권활동가로 변모하는 모습은 듣는 이의 태도와 자세가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구팀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되는 그것의 파괴적 영향력, 그 속에서도 삶을 지속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다양한 이들의 서로 다른 기억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증언과 기록, 악한 일본군과 선한 연합군 간의 대립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리고 전시라는 특성을 살려 피해자들의 삶을 전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보고자 했다. 증언, 복제된 문서와 사진, 조선인 ‘위안부’와 전쟁터의 모습을 포착한 영상, 설치작품과 영상 작품 등 여러 형태의 전시품으로 공간을 구성해 관람객들의 다양한 감각을 자극해보려 했다. 문제는 이같은 연구팀의 의도가 관람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지였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녀도 할머니도 아닌 피해자들의 중년의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고, 준비한 예술작품들을 설명할 언어는 모자랐다. 전시 기간 중 운영하기로 한 도슨트 프로그램의 대본을 만드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고, 연구팀 모두가 관람객에게 전시를 설명하는 일에 커다란 부담감을 가지기도 했다.
전시 개관과 함께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역시 1944년 촬영·인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위안부’의 실물 사진이었다. 버마 미치나 지역, 그리고 중국 윈난성 쑹산 지역의 ‘위안부’를 촬영한 이 사진은 이미 알려져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전쟁 당시 인화된 실물 사진이 ‘최초’로 전시·공개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전시장을 방문한 많은 관람객들은 정작 실물 사진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를 촬영한 오래된 사진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지만, 다른 전시품들 앞에서도 긴 시간을 보냈다. 증거로서만 기록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애에, 그들의 이야기 속에 자리 잡은 것으로서 기록에 궁금증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오끼나와에서 여생을 보낸 배봉기씨처럼 기록만으로 설명이 어려운 피해자들의 삶에 더욱 크게 공명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했다.
이와 함께 연구자로서 관람객에게 맞는 설명, 올바른 설명을 제시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한층 단단한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처음의 고민과 부담은 덜해졌다. 사람들이 인상 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위안부’의 목소리와 생애, 삶의 지점들은 각기 달랐고 특정한 장면으로 수렴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안부’들이 살아온 삶에 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좀더 촘촘하고 넓게 쌓이는 것 같았다. 보름을 약간 넘긴 전시기간 동안 불완전한 기억을 보탠 다양한 이들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해석이 풍부해지고 역사가 확장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이렇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이 ‘우리’의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김소라 /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
2019.3.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