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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반’과 한반도의 미래

이혜정

이혜정

1919년 빠리강화회의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1918년 1월에 전후 처리 14개 원칙 중 하나로 천명한 민족자결에 고무된 한국·중국·이집트·인도 등의 반(反)식민 독립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는 ‘가장 추악한 배반’이었다. 1918년 1월부터 빠리강화회의가 끝나는 1919년 6월까지를 ‘윌슨적 순간’(Wilsonian moment)으로 명명한 바 있는 하바드대학 에레즈 마넬라(Erez Manela) 교수가 최근 『뉴욕타임즈』 기고문에서 소환한 역사적 평가다.

 

2019년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의 새로운 북미관계와 한반도평화체제 및 비핵화의 단계적·동시 병행 추진이라는 협상 기조를 뒤집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면서 합의 없이 끝났다. 정상회담 기간 미국 조야는 트럼프의 개인 비리 ‘해결사’ 노릇을 했던 마이클 코언(Michael Cohen)의 의회 청문회에 빠져 있었고, 북한과의 나쁜 거래보다는 협상의 실패가 낫다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속도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며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코언 청문회가 자신이 실무진이 준비한 합의를 거부하고 걸어 나오는 데 영향을 미쳤음도 인정했다.

 

‘윌슨적 순간’이 ‘가장 추악한 배반’으로 끝난 것처럼, 한반도의 냉전과 핵 위기를 끝내고 영구한 평화체제를 건설할 역사적 기회는 트럼프 리스크로 좌초하는 것인가?

 

미국의 유서 깊은 배반’, 그래도 희망은 있다

 

미국의 ‘전력’을 돌아보면 전망은 밝지 않다. 1787년 제정된 헌법에서 백인의 3/5으로 계산되었던 흑인노예나 보호구역에 박제될 운명의 원주민, 대테러전쟁과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파괴된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강압의 제국’으로서 미국이 써내려온 배반의 역사는 유구하다. 변경의 백인 개척민조차 뉴잉글랜드의 문명과 ‘인디언’ 야만지대 사이의 주변인으로 보던, 문명적·인종적 타자에 대한 편견도 완고하기만 하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은 특히 깊어서 미국은 흑인노예의 반식민혁명으로 1804년 탄생한 아이티와는 남북전쟁 이후에야, 그리고 소련과는 대공황 와중에야 수교했다. 미국의 문명적 편견을 고려해보면, 미국인 청년 웜비어(O. Warmbier)를 죽인 독재국가 북한은 완벽한 타자이다. 게다가 북한은 핵 위험을 제외하면 전략적·경제적 존재감이 없다. 워싱턴 주류 외교안보 엘리트들의 시각에서, 북한과의 수교는 소련 견제 효과를 지녔던 중국과의 수교나 중국 견제와 함께 경제적 유인을 지녔던 베트남과의 수교와 비견할 이득은 없고, 유엔사 해체와 주한 미군 철수 등으로 이어진다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험하게 할 뿐이다.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경제건설에 집중하고 있다면,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 집중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단계적·점진적 협상에서 일괄타결로 분명한 선회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트럼프 임기 내에 북핵 문제의 해결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쌍중단’ 상태에서도 북한의 핵물질 생산은 이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당이 북핵 문제를 트럼프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로 인식하고 트럼프 역시 ‘쌍중단’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또한 협상 이외의 대안은 없고 북한의 협조 없이는 고도화된 핵과 미사일 능력을 실제 해체할 수 없다는 현실론이 초당파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빅딜’이 아니더라도 트럼프와 김정은의 타협이 국내정치적으로 수용될 가능성도 있다.

 

삼중고의 위기, 선의에 의존할 때가 아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 정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있고,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그린뉴딜이나 부자증세, 의료보험 확대 등 트럼프가 사회주의로 공격하는 국내정치 이슈들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020년 대선 국면에서 민주당은 대북제재 완화 등 그 어떤 ‘양보’도 용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역시 ‘쌍중단’으로 북핵 문제는 봉합한 뒤, 감세와 추가적인 대규모 인프라 투자의 성과와 2016년 대선의 주요전략이었던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는 한편 민주당을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선거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은 북미협상의 교착으로 인한 남북경협 및 한반도평화체제 수립의 장애, 트럼프의 압력에 따른 동맹 비용의 증가, 그리고 최근 주한미군의 사드 ‘정식’ 배치 추진이 경고하듯 미국의 대중 군사 견제의 강화에 따른 중국과의 긴장이라는 ‘삼중고’에 처할 수도 있다.

 

백년 전 윌슨에게 선의 혹은 자비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동맹의 관성과 트럼프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것은 더이상 한국의 선택지가 아니다. 동맹은 평화의 수단이며 공동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트럼프를 넘어 미국 조야 전체에 한반도 평화의 이익을 설득하며 트럼프 이후를 또한 대비할 때이다.

 

이혜정 /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2019.3.13. ⓒ 창비주간논평